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앞에서는 한 여인의 삶을 비극적으로 이끌어간 원인을 ‘인정(人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각박한 인정세태를 고발하고 있었던 신유한과 이덕무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향랑고사를 수용하여 형상화함에 문제의 원인을 ‘인정(人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제도(制度)’에 주목하여, 당시의 질곡된 가족제도를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고 있는 이학규와 이안중의 작품을 대상으로 그들의 문제의식을 고찰하기로 하겠다.
山有花上江隖 | 산유화는 강 언덕 위에 있고 |
砥柱碑下江渚 | 지주비 아래로는 강 물가라네 |
愁愔愔采薪女 | 시름겨운 소리로 나무하는 아낙의 |
長傷嗟向誰語 | 길고 슬픈 탄식은 누굴 향해 말하는가 |
還歸家見猶父 | 친정에 돌아와 아버지를 뵈었지만 |
噫不諒以威缺 | 슬프다! 위엄 없어 살펴주시지 못하네 |
男有婦可決去 | 남자는 아내 있어도 쫓아낼 수 있는데 |
女有夫不再許 | 여자는 남편 있으면 재혼이 불가하다네 |
潛垂淚出門戶 |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문 밖으로 나서니 |
傷春心向前浦 | 상처입은 어린 마음에 앞 강으로 향하네 |
橫盤渦久近佇 | 비낀 곳 소용돌이 오랜 근처에 우두커니 섰다가 |
輕騰身若投杵 | 마치 절구 찧듯 가볍게 몸을 던지는구나. 李學逵, ‘山有花’ 第1行-12行, 『嶺南樂府』. |
이학규의 「산유화(山有花)」의 일부이다. 이 작품 또한 기본적인 시상 전개는 향랑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당대의 제도적 모순을 인식하는 데까지 사고가 전개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단순한 언급의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제도의 부조리와 모순을 인식한 채, 시적 화자의 발화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보편적 가족 제도였던 처첩제도와 개가금지(改嫁禁止)에 대한 규범을 정면에서 문제삼고 있는 대목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이덕무의 경우는 향랑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찾아보고자 했다면, 이학규의 경우는 위 작품에서와 같이 제도적 측면에서의 문제점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郎如裊裊開花樹 | 낭군님은 하늘하늘 꽃 핀 나무와 같은지라, |
花落明年復滿枝 | 꽃 떨어져도 내년이면 다시 가지 무성해지네. |
妾如灼灼著枝葉 | 첩은 바짝 마른 나무가지에 드러난 잎새 같아서, |
一落曾無更著時 | 한 번 지고 나면 일찍이 다시 피어나는 때가 없지요. 李安中, ‘山有花曲’ 中 第二首, 「丹邱子樂府」金鑢, 『藫庭叢書』卷三十. |
이 작품의 경우도 역시 향랑 사건을 낭만적 차원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해 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다만 그 이면적 의미에 주목해 보면, 낭군에 대해서는 “하늘하늘 꽃 핀 나무와 같다[郎如裊裊開花樹]”고 언급하였고, 자신에 대해서는 “첩은 바짝 마른 나무가지에 드러난 잎새[妾如灼灼著枝葉]”와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함의(含意)를 생각해보면 제2구와 제4구에서의 표현과 같이 당대의 가족 제도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형상화 방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작품에서는 ‘나무[樹]’와 ‘꽃[花]’ 그리고 ‘잎새[葉]’의 이미지가 중요한 이미지를 내포하는데, 시상 전개에 주목할 때 ‘나무’는 ‘남성’에 해당하는 지위를 지니고 있으며, ‘꽃’과 ‘잎새’는 ‘여성’에 해당하는 지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혼인제도와 관련해서 볼 때는 더더욱 그러한 표현이 얻고 있는 함의(含意)를 절감하게 된다. 이학규의 작품에서 남자는 부인이 있는데도 그 부인을 버릴 수 있지만 여자는 남편이 한 번 정해지면 종신토록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다시 혼인할 수 없다는 질곡된 혼인제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인용
1. 서론
3. 향랑 고사를 수용한 한시와 가족제도
3.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
3.2. 개가의 불가피성 옹호
3.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3.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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