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앞에서는 유교적 이념인 ‘열(烈)’을 교화의 목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에서 형상화한 이광정의 「향랑요(香娘謠)」와 향랑의 비극적인 죽음을 낭만적인 태도로 재구성하면서, ‘개가(改嫁)’를 옹호하고자 한 최성대의 「산유화여가(山有花女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유한, 이덕무 등은 또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기본적인 서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대의 각박한 인정세태를 고발하는 정도의 현실인식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향랑고사를 통한 가족제도에 대한 인식에서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데에 도달하고 있다. 물론 그같은 인식 경향은 아직 미미(微微)하여 새롭고 보편화된 제도로의 확립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인정세태의 그릇됨 등을 시적 화자의 발화 행위를 빌어 지적하고 있는 정도에까지 나아가고 있음이 확인된다.
念與君離別 泣涕零如雨 | 그대와 더불어 이별함을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 비처럼 나부끼네 |
故鄕不可處 良景不可覲 | 고향에는 거처할 수 없으니 좋은 경치도 볼 수가 없다네 |
無信叔伯言 女實狂而誤 | 무신한 숙부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실로 미쳐서 그릇되었다” |
登高以遠望 肅肅雉振羽 | 높이 올라서 멀리를 바라보니 푸드득 소리내며 꿩은 깃을 떨치네 |
雉鳴從其雌 人心不如故 | 꿩도 울며 수컷을 따르건만 사람 마음은 옛날과 같지 못하네. 申維翰, ‘山有花曲’ 第1章, 第9行-18行, 『靑泉集』卷二. |
「산유화」곡은 ‘일선(一善)’府의 열부인 향랑의 원망하는 노래이다. 향랑은 그 지아비로부터 절연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부모가 안계셨는데 그 숙부는 개가하도록 하고자 하여 울면서 불가함을 말하고는 스스로 낙동강에 몸을 던졌다. 강 위의 험한 비탈에는 길재 선생의 절의를 나타내는 지주비가 있었다. 향랑의 죽음에는 나물캐는 계집아이가 함께 있었는데 비석 아래에서 서로 만났다. 「산유화곡」을 지어서는 계집아이에게 그것을 부르도록 하고는 노래를 마치자 물에 뛰어들었다. 오늘날 강가의 아이들이 익숙하게 부르는 「산유화」의 소리는 매우 슬프고 처량하다. 그 후로 서울의 최사집 군이 그 사건을 정밀하고 잘 살펴 기록하여 「산유화가」을 지었는데 완연히 아름다우면서도 원망하되 성내지 않음이 훤하게 아름다웠음이라. 내 그 가사말을 보니 실로 나무하는 계집의 말로 향랑의 생각을 서술함이 중국의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와 더불어 서로 겉과 속이 되어 향랑의 곡을 남겼으나 다만 교외의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만 불려지고 있고 사람들은 그 장구의 깊은 강개를 얻어 깨닫지 못함이라. 향랑은 본디 미천하여 글을 몰라 이 노래를 그처럼 지을 줄 몰랐다. 다만 누추한 거리의 아이들이 재잘거림으로 인해 드러났음이니 그 바르고 장엄하고 오로지 정성됨이 지극하여 나 또한 슬퍼하여 마침내 그 뜻을 거듭 인용하여 그 가사를 글로 남기되 한나라 악부 구장인 ‘미무지원(蘼蕪之怨)’에서의 기미를 본떠서 「산유화구가」를 지음이 이 노래이다. 감히 옛날과 합치된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훗날 강남에서 민요를 채집하는 자가 장차 마찬가지로 향랑의 원망하는 노래를 얻어서는 그것을 늘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山有花曲者 一善烈婦香娘之怨歌也. 香娘見絶於其夫 還家而父母不在 其叔欲令改嫁 則泣而道不可 自沉於洛東江 江上峻坂 有吉先生表節砥柱中流碑 娘之死也 與采春儕女 相遇於碑下 作山有花曲 使春女歌之 歌竟而赴水 卽今江畔兒 慣唱山有花 聲甚悽惋 其後漢京崔君士集 記其事精甚爲作「山有花歌」 宛轉麗都 怨而不怒 陽陽乎美矣 余覲其辭 實籍采薪女口語 以叙香娘之思 與漢孔雀東南飛行 相表裡而香娘遺曲 但在郊童齒頰間 人不得采其章句甚慨也 娘素賤不解文藻 其爲此曲 只因巷俚之嘔啞而發 其端莊專精之天 余又悲之 遂復用其意 而文其辭 竊自幾於漢樂府九章蘼蕪之怨 而爲山有花九歌 是曲也 不敢曰 有合於古 而後之采風於江南者 將亦有以香娘怨曲得而陳之矣.
이 작품에서 신유한은 비판의 대상을 인정세태의 각박함에 초점을 맞추고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더 이상 향랑이 친정에 머무를 수 없게 되기까지 친정 식구들의 학대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조카딸에게, “네가 실로 미쳐서 그릇되었다[女實狂而誤]”라고 말하는 숙부의 몰인정함, 그리고 “꿩도 울며 수컷을 따르건만/ 사람 마음은 옛날과 같지 못하네[雉鳴從其雌/人心不如故]”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자연(自然)의 일부인 꿩들도 암․수가 서로 정답게 살아가는데, 사람의 인정만은 옛날과 달리 각박해졌음을 비판하고 있다.
娘雖百姓女 頗識古人法 | 향랑이 비록 백성의 딸이라곤 하지만 자못 옛 사람들의 법을 알았다네 |
恭順爲賢女 不然爲惡婦 | 공손하고 순종하는 어진 여인이었는데 그렇게 여기지 않아 못된 부인 되었네 |
謹心承夫意 夫曰不可久 | 삼가는 마음으로 남편 뜻을 받들었건만 남편이 말하기를 함께 오래살 수 없다네 |
頗聞云云說 以我他人嫁 | 약간은 이러저러한 말을 들었지만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라고까지 하네 |
欲生生何喜 不如死之可 | 살고자 해도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겠나 죽음을 선택하는 것만 같지 못하네. 李德懋, ‘香娘詩’, 第19行-28行, 『靑莊館全書』卷二. |
인용된 부분은 이덕무(李德懋)의 「향랑시(香娘詩)」로 전체 128행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의 일부이다. 이덕무는 이 작품에서 향랑의 삶을 전(傳)과 같은 일대기적 형식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부분이 조귀상(趙龜詳)이 입전하였던 「향랑전(香娘傳)」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작가들과 구분되는 점은 시와 함께 남겨놓은 병서(幷序) 부분에서도 밝혔듯이, 향랑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부조리한 가족제도 등의 다른 원인들로 인해 결국은 목숨을 끊게 되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당시의 문제점을 나름대로 파악하여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병서(幷序)해 놓은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향랑은 선산 고을의 여자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고결하여 여자의 거동이 있었다. 그러나 계모가 인자하지 못하였고 시집가서는 남편이 여자만 탐하고 사나워서 이유없이 때리고 꾸짖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도 그 아들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시부모가) 재가할 것을 권하자 향랑은 울면서 친정으로 돌아왔는데 계모가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자 숙부에게 돌아갔으나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울면서 시댁에 돌아왔는데, 시아버지께서 하는 말이, “너는 어찌 개가를 하지 않았느냐? 나에게 돌아올 필요가 없다.” 향랑이 목이 메여 울면서 말하기를 “원하옵건대 문 밖의 땅이라도 집을 지어서 죽는 날까지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지만 시부모가 끝내 들어주지 않자 비로소 죽을 결심을 하고서는 몰래 지주비 아래에 가서 울다가 나무하던 어린 계집아이를 보았는데 한 고을에 사는 아이였다. 자신의 사정을 하나하나 말하고는 “내 남편이 나를 미워하고, 나의 계모와 숙부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고 나의 시부모님은 차마 나에게 다시 시집가라고 하니 내가 어찌 돌아가겠느냐? 죽어서 자애로운 내 어머니를 보려한다. 너에게 신 한 짝을 줄테니 가지고 돌아가서 우리집에 고하기를, ‘향랑은 돌아갈 곳이 없음을 슬퍼하여 저 강물 속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 주렴! 다시 「산화곡」 한 구절을 노래하고는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 나무하던 계집아이가 그 사실을 전하자 고을 사람들이 정녀(貞女)라고 불렀다. 조정에서도 마을에 정표하였다. 내가 그 계모와 숙부 및 그 시아버지, 시어머니의 의리에 대한 생각 없음이 한(恨)스러워서 시로써 자못 상세하게 기록한다.
香娘善山村女也 性端潔有女儀 然後母不慈 嫁而夫女痴悍 無故而毆罵之 舅姑不襟其子 迺勸再嫁 娘泣歸家 母拒不納 歸叔父不受 又泣歸舅姑 舅曰 爾盍嫁 無用歸我 娘哽咽曰 願借門外地 建屋以終身 舅姑執不聽 始有死意 潛往哭於砥柱碑下 見采薪童女 同里也 歷擧平生 寄之曰 吾夫怒我 吾母與叔不容我 吾舅姑忍我以更嫁也 我安歸 歸見我慈母也 寄汝以雙屨 持歸告吾家曰 香娘悲無歸而投于彼江中也 又歌山花曲一闋 遂赴水死 采薪女傳其事 鄕人號曰 貞女 朝廷旌于閭 余恨其母叔曁其舅姑無思義 以詩之頗詳. 李德懋, ‘香娘詩’, 『靑莊館全書』卷二.
이처럼 이덕무는 향랑이 죽음을 택하여 열녀(烈女)로서 칭송받는 것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녀가 비록 죽어서 조정으로부터 정려문이 세워지고 했다지만 이덕무의 관심은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드러나듯이 그가 향랑을 시적 대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향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변 사람들의 그릇된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작용하고 있는 가족제도의 경직성에 대하여 그는 이를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셈이다. 앞서 살펴본 신유한과 이덕무가 ‘인정(人情)’이라는 인간 본성의 차원에서 문제점을 찾고 있었다면 다음에서 살펴볼 이학규의 경우는 제도적 측면의 모순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고 있다.
인용
1. 서론
3. 향랑 고사를 수용한 한시와 가족제도
3.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
3.2. 개가의 불가피성 옹호
3.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3.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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