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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전경원, 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의 의미 - 3. 향랑고사 수용 한시와 가족제도, 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전경원, 향랑고사를 수용한 한시의 의미 - 3. 향랑고사 수용 한시와 가족제도, 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

건방진방랑자 2022. 10. 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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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향랑고사 수용 한시와 가족제도

 

 

1. 유교적 ()’이념의 강조

 

 

앞장에서는 향랑의 사건을 기초로 향랑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하는 점을 가족제도와 관련하여 제도적 차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향랑 사건을 토대로 형상화된 한시 작품들에서 가족제도에 대해 어떠한 수용방식과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향랑사건이 있던 당시 선산 부사였던 조귀상이 향랑의 전()을 입전한 이후로 많은 사대부들에 의해 향랑 고사가 한시의 중요한 소재로 부각되었다. 그 가운데 조귀상이 남긴 전()을 중심으로 한시를 창작하되 작가별로 작품 내에서 가족제도에 대해 반응하는 태도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광정의 향랑요(香娘謠)는 장편 서사한시로서 전체 148행으로 이루어진 7언 고시(古詩)이다. 작품의 전반부는 조귀상의 전()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향랑의 출신과 어린시절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一善女子名薌娘 선산(善山)의 여자로 이름은 향랑이요
生長農家性端良 농가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품이 단정했네
少小嬉戱常獨遊 어려서부터 장난치지 않고 혼자 놀면서도
行坐不近男兒傍 남자 아이들 곁에는 가까이 하지도 않았네
慈母早歿後母嚚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는 계모가 어리석어서
害娘箠楚恣暴狂 향랑에게 해() 입히며 매질하고 포악하게 굴었건만
娘愈恭謹不見色 낭은 더욱 공손하고 삼가며 낯빛도 변치 않고
紡絲拾菜常滿筐 물레질과 나물 캐기에 항상 바구니 가득했네 李光庭, ‘香娘謠’, 1-8, 訥隱先生文集卷一.

 

인용된 부분은 작품의 서두 부분으로 향랑의 출생과 어린 시절 성장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그다지 장난도 치지 않았고, 남자아이들이 노는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는 사실[少小嬉戱常獨遊/ 行坐不近男兒傍]을 다분히 강조하면서, 향랑의 유교적 덕목이 어린 시절부터 갖추어진 인물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한 면은 부덕(不德)한 계모 아래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더욱 공손하고 삼가며 자식으로서 낯빛을 조심하였다고 서술하는 대목[害娘箠楚恣暴狂/ 娘愈恭謹不見色]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 뒤로는 향랑 사건의 전모를 입전되었던 내용에 입각하여 서술한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부에 이르면 작가 자신의 향랑 고사에 대한 인식과 수용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주목을 요한다.

 

至行端宜化暴愚 지극한 행실과 단정한 품성으로도
終不見容而底死 끝내 용납되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는가
或言義烈大抵窮 혹자는 의()와 열()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고도 하지만
天生義烈風百世 하늘이 의로움 내어 열() 풍속을 백세에 끼쳤네
不待生前倘來寄 생전에 혹시라도 요행으로 오기를 바라지 말게나
烏山洛江節義藪 금오산 낙동강은 절의(節義)가 우거진 곳이라네
卓犖高標聯史書 우뚝하고 빼어난 자취가 잇달아 역사에 씌어져 있네
星軺北去不復廻 사신의 수레는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竹田靑靑五柳墟 대밭이 푸르른 곳은 오류 선생의 터일세
尙今村嬌守夜閨 아직도 마을 계집아이들은 밤이면 안방문을 꼭 닫고
下與牛狗能衛主 아래로는 소와 개까지도 능히 주인을 지킨다네
正氣磅礴也不死 정기가 충만해서는 스러지지 않고
鍾生人物無豐窶 인물을 내실 적에 차별을 두지 않았네
近聞星山兩小娘 최근에 들으니 성산의 두 낭자가
隻手拔塚死報父 맨손으로 무덤을 파서 죽음으로 아비 원수를 갚았다네
擇地焉不處此間 땅을 찾는다면 어찌 이런 곳에 거처하지 않겠는가
吾將匹馬營農圃 내 장차 필마로 돌아가 농사짓고 밭이나 가꾸려네. 李光庭, ‘香娘謠’, 131-148, 訥隱先生文集卷一.

 

인용된 부분에서와 같이, 이광정은 향랑의 죽음을 열부(烈婦)’의 결단이었음을 강조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칭송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한 점은, “()와 열()은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고도 하지만/ 하늘이 의로움 내어 열() 풍속을 백세에 끼쳤네[或言義烈大抵窮/天生義烈風百世]”라는 언급을 통해서도 향랑의 사건을 교화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절의(節義)라는 유교적 덕목으로 기억될만한 해당 지역 출신들의 인물을 나열하면서 교화적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사신의 수레는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고/ 대밭이 푸르른 곳은 오류선생의 터일세[星軺北去不復廻 /竹田靑靑五柳墟]”는 고려말 충신이었던 김주(金澍)와 길재(吉再)를 일컫는 표현이다.. 이처럼 이광정은 향랑의 사건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유교적 덕목의 하나인 ()’ 의식과의 관련성 속에서 수용함으로써 교화(敎化)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세상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고단하고 외로운 처지에 놓였던 향랑의 자결이 과연 그가 인식한 바와 같이 ()’에 대한 확신에 기인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인용

목차 / 지도

1. 서론

2. 향랑의 죽음과 가족 제도

3. 향랑 고사를 수용한 한시와 가족제도

3.1. 유교적 열이념의 강조

3.2. 개가의 불가피성 옹호

3.3. 각박한 인정세태 고발

3.4. 질곡된 가족제도 비판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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