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 선진 - 7. 안연이 죽자 그의 아버지가 외곽을 사주길 공자에게 청하다 본문

고전/논어

논어 선진 - 7. 안연이 죽자 그의 아버지가 외곽을 사주길 공자에게 청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10. 9. 18:20
728x90
반응형

7. 안연이 죽자 그의 아버지가 외곽을 사주길 공자에게 청하다

 

 

顔淵,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顔路, 之父, 無繇. 孔子六歲, 孔子始敎而受學焉. , 外棺也. 請爲槨, 欲賣車以買槨也.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 孔子之子伯魚, 孔子. 之才雖不及顔淵, 然己與顔路以父視之, 則皆子也. 孔子時已致仕, 尙從大夫之列, 言後, 謙辭.

氏曰: “孔子遇舊館人之喪, 嘗脫驂以賻之矣. 今乃不許顔路之請, 何邪? 葬可以無槨, 驂可以脫而復求, 大夫不可以徒行, 命車不可以與人而鬻諸市也. 且爲所識窮乏者得我, 而勉强以副其意, 豈誠心與直道哉? 或者以爲君子行禮, 視吾之有無而已.’ 夫君子之用財, 視義之可否, 豈獨視有無而已哉?”

 

 

 

 

 

 

해석

顔淵,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안연이 죽자, 안연의 아버지인 안로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 외곽을 만들 것을 청하였다.

顔路, 之父, 無繇.

안로는 안연의 아버지로 이름은 무요이며,

 

孔子六歲,

공자보다 6살이 어리니,

 

孔子始敎而受學焉.

공자가 처음 가르칠 때 배움을 받았을 것이다.

 

, 外棺也.

곽은 외관이다.

 

請爲槨, 欲賣車以買槨也.

곽 만들길 청했다는 것은 수레를 팔아 외곽을 사고자 하는 것이다.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공자께서 재주가 있건 없건 또한 각자가 아들이라고 말한다. 나의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 관은 있었지만 곽은 없었다. 내가 수레를 팔아 도보로 다니면서 곽을 만들어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부의 뒤를 따라다녀야 해서, 도보로 다닐 순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孔子之子伯魚, 孔子.

리는 공자의 자식 백어이며,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之才雖不及顔淵,

공리의 재주가 비록 안연에 미치지 못하나,

 

然己與顔路以父視之, 則皆子也.

자기와 안로가 아버지의 입장으로 보면 모두 자식이다는 말이다.

 

孔子時已致仕, 尙從大夫之列,

공자는 그때에 이미 벼슬을 관뒀으나 여전히 대부의 열을 따랐는데,

 

言後, 謙辭.

라고 말한 것은 겸손히 말한 것이다.

 

氏曰: “孔子遇舊館人之喪,

호인(胡寅)이 말했다. “공자는 옛 여관 초상에 가서는

 

嘗脫驂以賻之矣.

일찍이 멍에를 벗겨 부조를 했었다.

 

今乃不許顔路之請, 何邪?

그러나 이제 안로의 청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葬可以無槨,

장례에서 외곽은 없을 수 있으며

 

驂可以脫而復求,

멍에는 팔면 다시 구할 수 있다.

 

大夫不可以徒行,

그러나 대부는 도보로 다닐 수 없고

 

命車不可以與人而鬻諸市也.

임금이 하사한 수레는 남에게 주어 시장에서 팔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且爲所識窮乏者得我,

또한 알고 있던 궁핍한 자가 나의 은덕을 고맙게 여김을 받기 위해서

 

而勉强以副其意,

억지로 그 뜻에 부합하려 한다면,

 

豈誠心與直道哉?

어찌 마음을 진실하게 하고 도를 곧게 펼 수 있겠는가?

 

或者以爲君子行禮, 視吾之有無而已.’

어떤 이는 군자가 예를 행함은 자신의 있고 없음을 볼 뿐이다.’라고 말했으나,

 

夫君子之用財, 視義之可否,

군자가 재물을 쓰는 것은 의의 옳고 그름으로 보는 것이지,

 

豈獨視有無而已哉?”

어찌 홀로 있고 없음만을 볼 뿐이겠는가?”

 

논어’ ‘선진(先進)’편의 이 장()은 생각할 점이 많다. 공자의 사랑하는 제자 안연(顔淵)이 죽자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에게 수레를 주십사고 청했다. 수레를 팔아 관을 넣을 외관(外棺)인 곽(, 덧널)을 마련하려고 했다. 공자는 거절하면서 위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도 널뿐이었고 덧널은 없었습니다. 나는 걸어 다니더라도 수레로 덧널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大夫)의 열에 든 적이 있어서 수레를 타야 하므로 걸어 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벼슬 살기 이전에 옛 객사 주인의 초상에는 참(, 수레 모는 말의 곁말)을 주어 부의(賻儀)한 일이 있다. 하지만 안연의 초상에는 수레를 내주지 않았다. 정약용은, 공자가 ()는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따라 덧널 쓰는 후장(厚葬)을 막기 위해 완곡하게 말했다고 보았다. 문인들이 안연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려 할 때에도 공자는 반대했다. 그런데 공자의 말 가운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나 같다고 한 말은 문맥을 떠나 깊은 감동을 준다.

재부재(才不才)재주가 있든 재주가 없든이다. 현불현(賢不賢), 현불초(賢不肖) 등과 뜻이 같다. 주어는 아래의 기자(其子)의 자()이다. 역각언기자야(亦各言其子也)의 주어는 기자(其子)의 부모로, 부모로서는 누구나 각자 자식에 대해 말하면서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학자 조익(趙翼)은 아들 내양(來陽)이 죽자 제문을 지어 , 내 아들이 지금 어디에 가 있느냐. 너는 어째서 내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통곡하고 재주가 있거나 재주가 없거나 간에 또한 각자 내 자식이라고 하면서 아끼기 마련이다라고 하여 이 장()을 인용했다. 어떤 부모든 자기 자식을 말하면서 사랑하는 법이다. 그렇거늘 딸아 아들아, 너는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이냐?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목차 / 전문 / 편해 / 역주

생애 / 공자 / 유랑도 / 제자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