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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본문

한문놀이터/인물

허균 -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건방진방랑자 2020. 5. 6.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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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나로 신분의 한계를 초극한 이달 스승님

蓀谷山人傳

 

 

손곡의 기본 정보와 과거

蓀谷山人李達字益之, 雙梅堂李詹之後. 其母賤, 不能用於世, 居于原州蓀谷, 以自號也.

少時, 於書無所不讀, 綴文甚富. 爲漢吏學官, 有不合, 棄去之,

 

삼당시인의 만남

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 相得懽甚, 結詩社. 方法蘇長公, 得其髓, 一操筆輒寫數百篇, 皆穠贍可詠.

 

박순의 도움으로 당풍을 섭렵하다

一日, 思菴相謂: “詩道當以爲爲正, 子瞻雖豪放, 已落第二義也.” 遂抽架上太白樂府歌吟王孟近體以示之, 矍然知正法之在是.

遂盡捐故學, 歸舊所隱蓀谷之莊, 文選太白及盛唐十二家劉隨州韋左史曁伯謙唐音, 伏而誦之. 夜以繼晷, 膝不離坐席.

凡五年, 悅然若有悟, 試發之詩, 則語甚淸切, 一洗舊日熊. 卽倣諸家體, 而作長短篇及律絶句, 鍛字聲揣律摩, 有不當於度, 則月竄而歲改之.

凡著十餘篇, 乃出而詠之諸公間, 諸公嗟異之. 皆以爲不可及, 霽峯荷谷一代名爲詩者, 皆推以爲盛唐.

 

당시로 이름을 날리다

其詩淸新雅麗, 高者出入, 而下不失劉錢之韻. 以下, 爲唐詩者皆莫及焉. 思菴鼓舞之力, 而其陳涉之啓漢高乎.

以是名動東國, 貴之而捨其爲人, 稱譽不替者, 詞林三四鉅公也. 而俗人之憎嫉者, 比肩林立, 屢加以汚衊, 寘之刑網, 卒莫能殺而奪其名也.

 

이달의 특징

貌不雅, 性且蕩不檢. 又習俗禮, 以此忤於時. 而善談今古, 及山水佳致喜酒, 能晉人書. 其中空洞無封畛, 不事產業, 人或以此愛之. 平生無着身地, 流離乞食於四方, 人多賤之. 窮厄以老, 信乎坐其詩也. 然其身困而不朽者存, 豈肯以一時富貴易此名也. 所著殆失盡, 不佞粹爲四卷以傳云.

 

이백에 뒤지지 않는 이달의 시재

外史氏曰: “朱太史之蕃, 嘗觀, 讀至漫浪舞歌, 擊節嗟嘗曰: ‘斯作去太白, 亦何遠乎.’ 權石洲韠見其斑竹怨: ‘置之靑蓮集中, 具眼者不易辨也.’ 此二人者, 豈妄言者耶. ! 之詩, 信奇矣哉.” -惺所覆瓿稿

 

 

 

 

해석

 

손곡의 기본 정보와 과거

 

蓀谷山人李達字益之, 雙梅堂李詹之後.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로 쌍매당 이첨[각주:1]의 후손이다.

 

其母賤, 不能用於世,

그 어머니는 미천한 출신이었기에 세상에 쓰일 수 없었고

 

居于原州蓀谷, 以自號也.

원주의 손곡에 기거하였기에 스스로 호로 지었다.

 

少時, 於書無所不讀, 綴文甚富.

이달은 어렸을 때에 책에 있어 읽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시문을 지은 것이 매우 풍부했었다.

 

爲漢吏學官[각주:2], 有不合, 棄去之,

한리학관이 되었지만 마음이 부합되지 않자 버리고 떠나버렸다.

 

 

 

삼당시인의 만남

 

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

고죽 최경창과 옥봉 백광훈을 따라 놀았는데

 

相得懽甚, 結詩社.

서로 만나 마음이 매우 맞아 시사(삼당시인)를 결성하였다.

 

方法蘇長公, 得其髓,

이달은 금방 장공 소식을 본받아 시법을 얻었고

 

一操筆輒寫數百篇, 皆穠贍可詠.

한 번 붓을 잡으면 갑자기 수백 편의 시를 써냈으니 모두 풍부하고 다채로워 읊을 만했다.

 

 

 

박순의 도움으로 당풍을 섭렵하다

 

一日, 思菴相謂:

하루는 사암 정승이 이달에게 말했다.

 

詩道當以爲爲正,

시도는 마땅히 당시(唐詩)를 짓는 것이 바른 것이 되니,

 

子瞻雖豪放, 已落第二義也.”

송나라 시인인 자첨은 비록 호방하긴 해도 이미 두 번째 등급으로 떨어졌네.”

 

遂抽架上太白樂府歌吟王孟近體以示之,

드디어 선반 위에 이태백의 악부와 가음시(歌吟詩), 왕유와 맹호연의 근체시를 꺼내어 보여줬는데,

 

矍然知正法之在是.

이달은 깜짝 놀라 정법이 여기에 있음을 알았다.

 

遂盡捐故學, 歸舊所隱蓀谷之莊,

마침내 기존에 배웠던 걸 모두 버리고 예전에 은거했던 손곡의 전장(田莊)으로 돌아가

 

文選太白及盛唐十二家[각주:3]劉隨州韋左史曁伯謙唐音, 伏而誦之.

문선과 이태백과 성당 12가의 시집과 유 수주와 위좌사와 백겸의 당음을 가져다가 엎드려 외웠다.

 

夜以繼晷, 膝不離坐席.

밤새도록 보아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고 무릎을 앉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凡五年, 悅然若有悟, 試發之詩,

대체로 5년이 흘러 기쁘게 깨우친 게 있는 듯하여 시험삼아 시를 지으니

 

則語甚淸切, 一洗舊日熊.

말이 매우 청아하고 절실해 한 번에 옛날의 모습을 씻어버렸다.

 

卽倣諸家體, 而作長短篇及律絶句,

곧바로 여러 시체를 모방하여 장편과 단편 율시와 절구를 지었고

 

鍛字聲揣律摩, 有不當於度,

글자와 성음(聲音)을 단련하고 운율을 췌마하다가 법도에 마땅치 않은 게 있으면

 

則月竄而歲改之.

한달 내내 숨었고 한 해 내내 고쳤다.

 

凡著十餘篇, 乃出而詠之諸公間,

대체로 10여편을 저술하여 바로 내놓았으니 여러 사람들이 읊다가

 

諸公嗟異之.

여러 사람이 감탄하여 경이로워했다.

 

皆以爲不可及,

최경창과 백광훈은 모두 그 수준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했고

 

霽峯荷谷一代名爲詩者,

제봉 고경명(高敬命)과 하곡 허봉[각주:4]의 한 시대의 유명한 시를 짓는 사람들은

 

皆推以爲盛唐.

모두 성당의 시풍이라고 추켜세웠다.

 

 

 

당시로 이름을 날리다

 

其詩淸新雅麗,

거의 시는 맑고 새로우며 곱고 미려해서

 

高者出入,

수준이 높은 건 왕유와 맹호연과 고적(高適)ㆍ잠삼(岑參)에 출입한 것 같고

 

而下不失劉錢之韻.

수준이 낮은 것이라도 유장경(劉長卿)ㆍ전기(錢起)[각주:5]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以下, 爲唐詩者皆莫及焉.

신라와 고려 이후로부터 당시를 짓는 사람들도 모두 이달의 수준에 미치질 못했다.

 

思菴鼓舞之力, 而其陳涉之啓漢高乎.

이것은 사암이 고무시킨 힘으로 진섭이 한 고조 유방을 열어준 것과 같은 것이다.

 

以是名動東國, 貴之而捨其爲人,

이달은 이 명성으로 우리나라를 울렸고 귀하게 여기며 그 사람의 서자란 신분은 버려두고

 

稱譽不替者, 詞林三四鉅公也.

칭찬하고 기리기를 변함없이 한 사람들이 문단에 위대한 시인 3~4명이 있었다.

 

而俗人之憎嫉者, 比肩林立,

그러나 세속의 사람들 중 증오하고 시기하는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빽빽하게 서서

 

屢加以汚衊, 寘之刑網,

여러 번 오욕과 멸시를 더하였고 형벌의 그물망을 두었지만

 

卒莫能殺而奪其名也.

마침내 죽이거나 명성을 빼앗을 순 없었다.

 

 

 

이달의 특징

 

貌不雅, 性且蕩不檢.

이달의 외모는 우아하지 않고 성품 또한 호탕하여 절제하질 않았다.

 

又習俗禮, 以此忤於時.

또한 세속의 예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 때문에 시류에 어긋났었다.

 

而善談今古, 及山水佳致喜酒,

잘 고금의 이야기를 말했고 산수의 아름다운 경치에 이르면 술 마시기를 좋아했으며

 

能晉人書.

진 나라 사람 왕희지의 글처럼 잘 썼다.

 

其中空洞無封畛, 不事產業,

마음은 빈 듯 경계조차 없었고 생업을 일삼지 않아

 

人或以此愛之.

사람들은 간혹 이 때문에 그를 아꼈다.

 

平生無着身地, 流離乞食於四方,

그러나 평생동안 몸을 붙일 땅조차 없이 사방으로 유리걸식하니,

 

人多賤之.

사람들이 많이들 그를 천시했다.

 

窮厄以老, 信乎坐其詩也.

곤궁하고 힘들게 늙어갔으니 참이로다, 시에만 몰두했다는 것이.

 

然其身困而不朽者存,

그러나 몸은 곤궁했음에도 썩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豈肯以一時富貴易此名也.

어찌 기꺼이 한 때의 부귀로 이 명성을 바꾸겠는가.

 

所著殆失盡, 不佞粹爲四卷以傳云.

저술한 것들이 거의 다 사라져 내가 오로지 마음을 써 4권으로 만들어 전하게 됐다.

 

 

 

이백에 뒤지지 않는 이달의 시재

 

外史氏曰: “朱太史之蕃[각주:6], 嘗觀,

외사씨가 말한다. “태사 주지번은 일찍이 이달의 시를 보다가

 

讀至漫浪舞歌, 擊節嗟嘗曰:

낭만무가에 이르러 무릎을 치고 감탄하고 칭찬하면서 말했다.

 

斯作去太白, 亦何遠乎.’

이 작품과 이태백의 작품의 거리가 또한 얼마나 멀겠는가.’

 

權石洲韠見其斑竹怨:

석주 권필은 반죽원이란 시를 보고 말했다.

 

置之靑蓮集中, 具眼者不易辨也.’

청련 이백의 시집 속에 넣어두면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도 쉽게 판별하지 못한다.’

 

此二人者, 豈妄言者耶.

이 두 사람이 어찌 망언을 하는 사람이겠는가.

 

! 之詩, 信奇矣哉.” -惺所覆瓿稿

! 이달의 시는 참으로 기이하구나.”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한시미학산책

 

 

 

  1. 李詹: 1345(충목왕1)~1405(태종5), 고려 말에서 조선 시대 초기의 문신이고 문장가.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본관은 홍주(洪州). 공민왕 14년에 문과에 급제 후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조선 건국 후 1398년(태조7) 등용되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ㆍ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역임했다. 하륜(河崙)등과 《삼국사략 (三國史略)》을 찬수하기도 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소설《저생전(楮生傳)》을 지었다. 저서로는《쌍매당집》이 있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본문으로]
  2. 한리학관(漢吏學官): 사역원(司譯院) 소속 관리 [본문으로]
  3. 십이가는 당 나라 盛唐의 시인으로 유명했던 12명의 시인. 劉隨州는 당 나라 中唐의 시인 劉長卿이 隨州刺史를 지냈으므로 부르는 이름임. 자는 文方, 開元 21년에 進士. 《유수주집》11권이 있다. 韋左史는 당 나라 중당의 시인 韋應物을 일컬음. 蘇州刺史를 지냈기에 보통 韋蘇州로 호칭됨. 《위소주집》10권이 있다. 伯謙은 元 나라의 楊士弘이 《唐音》을 지었으니 그를 가리킴. [본문으로]
  4. 霽峯ㆍ荷谷 : 제봉은 高敬命의 호. 고경명은 조선 시대의 시인이자 의병장이었음. 문과에 장원하여 工曹參議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시호는 忠烈. 荷谷은 許篈의 호. 허균의 친형으로 시와 문장에 뛰어났었다. 문과에 급제 후 여려 벼슬을 지냈다. [본문으로]
  5. 錢起: 당 나라 중당의 대표적 시인. 大歷 十才子의 한 사람. 進士로 考功郞中의 벼슬을 지냈다. [본문으로]
  6. 朱之蕃: 명 나라 金陵人. 萬曆에 進士, 吏部 侍郞을 거쳐 朝鮮에 使臣으로 왔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고 시로도 이름이 크게 났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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