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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11.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 3.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11.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 - 3.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건방진방랑자 2021. 12. 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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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과 시능궁인(詩能窮人)

 

 

궁해져야만 시가 좋아진다

 

예전 시화서(詩話書)를 들추다 보면 유난히 시인과 궁곤(窮困)의 관계에 대한 예화를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크게 간추려 보면,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즉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의와, ‘시능궁인(詩能窮人)’ 즉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관념으로 대별된다. 엄밀히 말해 이 두 가지 생각은 서로 상반되는 명제이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은 궁핍한 환경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잘 쓰게 한다는 말이고, 시능궁인(詩能窮人)은 시를 쓰는 행위가 시인을 궁핍한 환경으로 몰아넣는다는 말이다.

 

대개 이러한 생각은 연원이 오랜 것이지만, 처음으로 이 말을 한 사람은 구양수(歐陽修)이다. 그가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이래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은 고전시학(古典詩學)에서 중요한 명제가 되었다.

 

 

나는 세상에서 이르기를 시인은 영달함이 적고 궁함이 많다고 함을 들었다. 대저 어찌 그러한가? 대개 세상에 전하는 시는 옛날의 곤궁한 이의 말에서 나온 것이 많다. 무릇 선비가 그 있는 바를 쌓아두고서도 세상에 베풂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를 산꼭대기나 물 밖에 놓아 즐김이 많다. 벌레나 물고기, 초목과 바람 구름, 새와 짐승의 모습을 보고 이따금 그 기괴함을 찾고, 마음속에 근심스런 생각이나 울분의 쌓임이 있으면 그 원망하고 풍자함을 일으켜, 타관살이 하는 신하나 과부의 한탄하는 바를 말하여 인정의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내니, 대개 궁하면 궁할수록 더욱 공교해진다. 그렇다면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거의 궁해진 뒤라야 공교해지는 것이다.

予聞世謂詩人少達而多窮’, 夫豈然哉? 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 凡士之蘊其所有而不得施於世者, 多喜自放於山巓水涯之外, 見蟲魚草木風雲鳥獸之狀類, 往往探其奇怪. 內有憂思感憤之鬱積, 其興於怨刺, 以道羈臣寡婦之所歎, 而寫人情之難言. 蓋愈窮則愈工. 然則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

 

 

앞서 본 한유(韓愈)불평즉명(不平則鳴)’과 같은 논리이다. 선비가 마음속에 지식과 경륜을 쌓아두고도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을 때, 마음속에 근심스런 생각이나 울분의 쌓임이 있게 되는데, 대개 이를 글로 표현하니 그 생각이 보통 사람들은 말하기 어려운 것을 그려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양수(歐陽修)는 궁하면 궁할수록 시가 더욱 좋아진다고 단정하여, ‘()’()’을 위한 전제임을 밝혔다. 물론 이 글에서 구양수(歐陽修)는 시능궁인(詩能窮人), 시가 사람의 운명을 곤고(困苦)하게 만든다는 생각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시를 창작하기 위해 궁핍함을 지속시키다

 

그런데 실제 이들 시화(詩話)에서 궁하면 시를 잘 쓴다는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과 시를 쓰면 궁해진다의 시능궁인(詩能窮人)’을 흔히 혼동해서 쓰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의 혼동은 단순히 옛 사람들의 의미 파악의 혼란에서 기인한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뛰어난 시인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궁()을 달고 살았다. 두보(杜甫)천말회이백(天末懷李白)에서 문장은 운명의 달함을 미워한다[文章憎命達].”고 하였고, 백락천(白樂天)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시인은 고생하는 괴로움이 많다[詩人多蹙].”고 하였다. 권필(權韠)임관보만사(任寬甫挽詞)에서 글로써 궁해짐은 예로부터 그랬나니, 가난과 질병은 시인의 일상(日常)이라[文窮自古然, 貧病乃其常].”고 했고, 허균(許筠)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서 이달(李達)의 시를 평하면서 평생 몸 붙일 곳도 없이 사방으로 유리걸식 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궁색한 액운으로 늙음은 진실로 그 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몸은 곤궁했어도 냣지 않을 시가 남아 있으니, 어찌 한 때의 부귀로 이 이름을 바꿀 수 있으리오[平生無着身地, 流離乞食於四方, 人多賤之. 窮厄以老, 信乎坐其詩也. 然其身困而不朽者存, 豈肯以一時富貴易此名也].”라고 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은 궁했기 때문에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시를 씀으로 해서 그들의 궁을 더욱 가중시키거나 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은 시를 통해서 망궁(忘窮)’은 했을지언정 송궁(送窮)’은 하지 못했다. 하지 못하기는커녕 트릴링의 말과 같이 오히려 시로 인해 송궁(送窮)’의 기회가 와도 이를 박차기까지 했다. 이럴 때 시인이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올곧음을 견지함과 같고, 시를 포기한다는 것은 시를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던 현실이나 대상에 대한 애정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 결과는 굴종과 타협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은 공()하기 위한 충분조건, ()은 궁()하기 위한 필요조건

 

여기서 우리는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과 시능궁인(詩能窮人)의 사고가 역의 명제이면서도 순환론적으로 맞물려 있음을 보게 된다. 즉 궁()의 상황은 시에 있어 공()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동시에 시는 궁()의 상황을 지속시키거나 가중시키는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의 처지에 있었던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지켜나가기 위한 자기 보호의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정신이 독자의 입장에서는 유궁즉유공(愈窮則愈工), 즉 궁하면 궁할수록 시는 더욱 좋아진다거나, “문장이 좋아질수록 집은 더욱 가난해졌네[文章益富家益貧].”와 같은 평가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능궁인(詩能窮人)은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과는 논리적으로 보아 역의 사고를 담고 있지만 실제로 이 두 가지는 모순관계에 놓이지는 않는다. 트릴링이 말한,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는 모순적 충동지향은 바로 시능궁인(詩能窮人)의 사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시능이후공(詩窮而後工)이라 할 때 궁()은 공()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은 궁()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또 시능궁인(詩能窮人)이라 할 때 시()는 궁하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궁()은 작시(作詩)를 위한 필요조건이 된다. 이때 ()’이란 물질적 빈궁(貧窮)보다는 실의와 좌절 같은 정신적 가치를 뜻한다. 물론 두 가지는 늘 붙어 다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단순한 경제적 결핍은 시인의 내면에 발분(發憤)의 욕구를 제고시키는데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정신적 갈등이 배제된 궁()은 궁()이 아니라 빈()일 뿐이다.

 

 

 

 

인용

목차

1. 불평즉명, 불평이 있어야 운다

2. 나비를 놓친 소년, 발분서정의 정신

3. 시궁이후공과 시능궁인

4. 궁한 사람의 시가 좋은 이유

5. 시는 궁달과는 무관하다는 주장

6. 시는 사람을 궁하게 만든다

7. 탄탈로스의 갈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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