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번과 허균
『소화시평』 권하 41번에서는 중국 사신인 주지번이 말하는 허균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이미 권상 35번 글을 통해 허균과 주지번이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이번 글에서 평가하는 걸 보니 단순히 친한 정도가 아니라, 어찌 보면 소울 메이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아예 허균을 매우 칭송하며 ‘중국에 있더라도 상위권에 랭킹될 정도의 실력파 문장가[雖在中朝, 亦居八九人中]’라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를 다룬 ‘관포지교(管鮑之交)’나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담을 다룬 ‘지음(知音)’이나 이안눌과 권필의 우정담 등이 모두 그렇듯이 자기를 알아주는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냐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설 연휴에 모처럼 성남에 사는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때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죽기 전에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 그리고 나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할 수 있는 한 사람만 있다면 그 인생은 잘 산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을 했었다. ‘잘 산 인생’이란 화두를 던졌을 때 누군가는 엄청난 부를 거머쥔 것에 대해,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 것에 대해 말할 것이다. 성공의 척도는 흔히 부와 권력으로 퉁 처지는 상황을 쉽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난 그런 척도보다 사람을 얻는 게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봤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상대방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성공에 대해 누구보다 축하해주고 기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의 실패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대기보다 응원해주고 힘을 북돋워줄 친구가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언제든 함께 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 바로 이게 진정한 성공이자 잘 살아간 인생이지 않을까.
이런 기준으로 허균을 보면 그는 분명히 성공한 인생이었고 잘 산 인생이었다. 그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그를 추켜세우며 중국에 있더라도 문인으로 이름을 떨칠 만한 존재라 평가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倦鳥何時集 孤雲且未還 | 지친 새 어느 때 모여들까? 외로운 구름 또한 돌아오질 않은데. |
浮名生白髮 歸計負靑山 | 헛된 명성 추구하느라 흰머리 나고 돌아갈 계책 청산을 져버렸구나. |
日月消穿榻 乾坤入抱關 | 세월은 뚫린 목탑에서 사라졌고 천지는 포관에 들어오네. |
新詩不縛律 且以解愁顔 | 그렇지만 새로운 시가 법칙에 얽매지 않아 또한 시름겨운 낯을 푸네. |
「유회(有懷)」라는 시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담고 있는 메시지인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차용한 시다. 벼슬길에서의 염증은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실상 이런 시를 쓴다는 건 ‘아직은 벼슬길에 얽매여 있어야 한다’는 속내를 담고 있다. 당장이라도 때려 치고 나올 수 있다면 이런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오히려 권필의 「해직후제(解職後題)」와 같이 일을 가문 둔 후의 한적한 감상을 적으면 되니 말이다.
1~2구에선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 채 벼슬길에서 헤매느라 시간만을 흘려보낸 이야기를 담았다. 이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3구에선 관녕의 일화를 인용하며 얼마나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는지, 맹자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맹자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저 돈이나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한스러운지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장가로서의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고 있어 4구에선 그런 상황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시를 지으며 회포를 풀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허균은 자신의 우울한 감정, 그리고 그걸 시라는 형식으로 통해 녹여내고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천상 문장가라 해야 맞을 것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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