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인문학과영화그어울림과맞섬 (10)
건빵이랑 놀자
1. 시크릿 선샤인? 밀양을 쓰게 된 이유 신애: 아저씨,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종찬: 뜻요? 뭐 우리가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 신애: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종찬: 비밀의 햇볕, 좋네예. 영화 초반,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이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대사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 왜 하필 밀양일까도 궁금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풀이하고 번역할 줄이야. ‘비밀의 태양’이라? 모르긴 해도, 밀양에서 이런 이미지나 기호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굳이 찾는다면, ‘밀양아리라’, 그리고 소박한 전원풍경 등의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 그러고 보면 이창동 감독은 이런 식의 낯익은 표상..
9. 에필로그: 송강호에게 보내는 박수 무미건조하기에 더욱 개성 넘치는 고향, 가족, 교회 - 근대인들의 욕망은 이 세 가지 회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이 영화가 말하듯, 그 모든 표상이 거짓된 판타지에 불과하다면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하는가? 신애의 삶은 진정 구제불능이란 말인가? 원작에선 그렇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아주 실낱같은 단서를 남겨 두었다. 카센터 사장 종찬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 신애다. 칸의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전도연의 연기는 과연 감탄할 만했다. 불안과 냉소, 허영과 절망 사이를 매끄럽게 넘나드는 그녀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어쩌면 관객과의 최소한의 소통조차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진정 경이로웠던 건 송강호의 연기였다. 영화를 보..
8. 욕망의 회로: 출구가 없다! 능력이 없는 이의 신에 대한 복수 이제 신애는 유괴범 대신 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탄다. 하지만, 용서가 그렇듯이 복수 역시 능력의 문제다. 그 나약한 몸으로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테이프 가게에 가서 시디를 슬쩍한다든지, 공원에서 하는 군중목회 때 찬송가 대신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틀어놓는 것. 약국 장로를 유혹해서 갈대밭으로 끌고 가는 것. 자신을 위한 구역예배 때 돌을 던지는 것 등. 한마디로 “신이 있다”고 하는 일상의 여러 장면 속에서 깽판을 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녀는 계속 태양을 쏘아본다. 자동차에서도 갈대밭에서도 집안에서도 그녀는 계속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봐, 보이냐구?” 그녀가 하는 유치한 신성모독은 자신을 ..
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 용서하겠다는 그녀, 이미 용서 받았다는 그놈 결국 그녀는 들꽃을 한아름 들고 교도소엘 찾아간다. 그녀의 예상(혹은 바람)과는 달리 죄인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하다. 당황하는 신애. 하지만, 그녀는 선언한다. 당신을 용서하겠노라고. 그런데 죄인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 원장: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가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신애: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셨다구요? 원장: 네,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습니다. 그라고 나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용서받으니 이래 편합니다. 내 마음이. 요새는 기도로 눈뜨고 기도로 눈감..
6. ‘신앙’ 혹은 과잉열정 조폭조직과 교회, 가족 조직과 교회, 그리고 가족의 공통점은? 안팎의 경계가 선명하다는 것. 즉, 이질적인 타자들의 어울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 설령 이질적인 존재가 결합한다손 쳐도 즉각 그 세계에 동화되어야만 한다. 즉, 이 집합체들은 아주 강력한 ‘동일성의 장’이라는 것이다. 조직에선 큰 형님, 교회에선 하느님 아버지, 집에선 아버지(혹은 어머니)라는 제일의적 중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장 속에선 끊임없이 사랑 혹은 충성을 확인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가족이 지옥이고, 충성심 없는 조직이 허깨비인 것처럼, 하느님과의 특별한 유대를 확인할 수 없는 교회 역시 생명력이 희박하다. 부흥회나 사경회를 통해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은혜를 받는다? ..
5. 교회와 신: 가족의 초월적 기표 불행과 하나님 밀양에 터를 잡을 즈음, 신애가 동네를 돌아다니다 갑자기 배가 아파 약국에 들어간다. 약사는 신애를 보자마자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거라고 진단한다. 혼자 사는 여자는 분명,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닐 거라고, 굳게 믿은(?) 것이다. 사실은 ‘생리통’이었다. 쩝!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약사는 결코 실망(?)하지 않고 신애한테 하느님 말씀이 담긴 책자를 선물한다. 약사: 원장님처럼 불행한 분은 하느님의 사랑이 꼭 필요해요. 신애: 저 불행하지 않아요, 약사님. 잘 살고 있어요. 남편을 잃고 혼자 사는 여자는 불행하다. 그래서 하느님이 꼭 필요하다. 이 말은 거꾸로 뒤집으면 이렇게 된다. 하느님이 필요하려면 불행해져야 한다? 즉, 기독교 신앙..
4. ‘스위트 홈’의 탄생과 근대 근대국민국가와 가족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이듯, 가족 역시 근대국민국가의 산물이다. 근대국민국가에서 가족은 가장 일차적인 경제단위이자 호명체계에 해당한다. 가족에 편입되어야 애국애족을 할 수 있고, 산업역군이 될 수 있으며, 국가경쟁력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아, 잠깐, 우리가 말하는 가족과 중세의 가문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중세적 가문은 대가족일 뿐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와 연계된, 가족이라기보단 마을 개념에 가깝다. 그에 비해 근대적 가족은 핵가족일 뿐 아니라 마을과의 네트워크가 절연된, 지극히 단자화된 단위에 속한다. 일부일처제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배치 하에서였다. 남녀 간 사랑의 목표는 결혼이 되었고, 사랑은 곧 결혼으로서만 완성되었다. 가정만이 성애의..
3. ‘고향’: 욕망의 일차적 귀환처 그저 일상의 공간인 밀양 “여기서 다시 시작할 거야” 밀양에 자리를 잡고 난 뒤, 신애는 피아노학원을 차리고 아들 준을 웅변학원에 보낸다. 그리고 이웃들과 교류를 시작한다. 옷가게와 약국, 웅변학원 원장과 학부모들 등. 그렇게 해서 차츰 밀양이라는 낯선 지역에 진입하게 된다. 물론 이 진입의 통로는 카센터 사장 종찬이다. 그는 그녀가 밀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만난 첫 번째 인물이다. 이때 이후 종찬은 신애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녀를 돕는다. 하지만 신애는 그의 존재감을 거의 느끼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왜? 남동생의 말을 빌리면, 그는 신애의 “취향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신애가 꿈꾸는 삶의 기준에서 보자면, 종찬은 그저 한심한 “속물”에 불..
2.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간 까닭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오다 신애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아들 준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온다. 그녀와 밀양 사이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밀양은 처음이에요. 살러 왔어요.” 실제로 한 번도 와 본 적조차 없다. 그런데 살러 왔다고? 이런 무모한! 대체 무슨 심사로? 그녀가 밀양을 선택한 이유는 오직 하나, 남편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유괴범이 된 웅변학원 원장에게 하는 말. “그냥 밀양이 좋아서 살러 온 거예요. 애 아빠 고향이기도 하구요.... 애 아빠가 평소에 늘 밀양 내려와서 살고 싶다고 노래 불렀었거든요.” 즉, 밀양은 남편의 고향이자 꿈이었고, 과거이자 미래였던 곳이다. 따라서 신애가 밀양으로 온 건 남편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버림으로써 남편과의..
1. 시크릿 선샤인? 밀양을 쓰게 된 이유 신애: 아저씨, 밀양이라는 이름의 뜻이 뭔지 알아요? 종찬: 뜻요? 뭐 우리가 뜻 보고 삽니까? 그냥 사는 기지. 신애: 한자로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볕. 좋죠? 종찬: 비밀의 햇볕, 좋네예. 영화 초반, 신애(전도연)와 종찬(송강호)이 자동차 안에서 나누는 대사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하면 시크릿 선샤인secret sunshine. 왜 하필 밀양일까도 궁금했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풀이하고 번역할 줄이야. ‘비밀의 태양’이라? 모르긴 해도, 밀양에서 이런 이미지나 기호를 떠올리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굳이 찾는다면, ‘밀양아리라’, 그리고 소박한 전원풍경 등의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가는 정도. 그러고 보면 이창동 감독은 이런 식의 낯익은 표상을 전복하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