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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4장 - 자웅동체의 시간관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4장 - 자웅동체의 시간관

건방진방랑자 2023. 3. 19.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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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웅동체의 시간관

묵시를 완성치 말고 낙원을 회복하라

 

 

도마복음서의 상징체계는 난해하다. 그러나 그 상징체계가 소기하고 있는 가치관을 이해하면 쉽게 풀려나간다. 놀라웁게도 그 상징언어들은 하나로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웅동체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자웅동체라는 상징을 인간이 지향해야 할 웅혼한 이상으로서 계속 제시한다. 그 상징성은 우리의 통념적 시간관을 역전시킬 때만이 료해(了解)된다. 그것은 기묘한 신화가 아니라 우리 삶에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다.

 

 

4

1예수께서 가라사대, “나이 먹은 어른이 칠일 갓난 작은 아이에게 삶의 자리에 관해 묻는 것을 주저치 아니한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이다.

2첫찌의 많은 자들이 꼴찌가 될 것이요,

3또 하나된 자가 될 것이니라.”

1Jesus said, “The man old in days will not hesitate to ask a small child seven days old about the place of life, and that person will live.

2For many of the first will be last,

3and will become a single one.”

 

 

성교(性交)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합일이요, 합일의 오르가즘을 통해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사라지는 합체불(合體佛)의 체험이며, ()과 양()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소통되는 도()의 경지다. 도는 음만으로, 또는 양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음이 되었다가(一陰), 양이 되곤(一陽) 하는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성교가 단지 생산성의 컬트(cult)일 뿐 아니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모든 성스러운 제식의 심볼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은 성교가 개인적 욕망의 분출이라기보다는 어떤 코스믹한 차원의 의미체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후대의 기독교가 성교라는 행위를 단순히 인간 몸의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로 보고, 사망의 죄악의 주체로 파악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의 모습이 도마복음서에는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마복음이 성교행위나 그와 관련된 컬트를 장려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여기서 논의하는 것은 단순히 상징적 표현에 관한 것이다. 도마복음은 종말론적 기독론(eschatological Christology)이 지배하기 이전의 원시기독교(proto-Christianity)의 다양한 운동의 실상을 생생하게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나는 원시기독교라는 말을 초대기독교(primitive Christianity)’ 이전의, 예수 사후 다양하게 발전한 예수운동들을 총괄하여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사춘기 때, 주로 남성에게서 이러한 에로틱 판타지가 나타나겠지만, 자기 몸이 자웅동체(androgyne)였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성욕은 분출되고 메이팅의 짝은 구해지지 않고 . 그러나 이러한 에로틱 판타지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코스믹 아키타입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창세기로 돌아가보자! 사실 창세기는 유대민족의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로부터 페니키아에 이르는 비옥한 초승달지역의 신화적 세계관의 한 전형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그 연못이고 아직도 잉어가 우글거린다. 이 잉어들은 성물이라서 잡을 수 없다. 아마도 이곳은 에데사왕국 시절에는 도마기독교의 본산이었을 수도 있다. 이곳 우르파와 도마복음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야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후에 진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빚어 만들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어 사람이라는 생명체를 만들었다(2:7). 그 사람이 곧 진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담아(’adamah)’에서 유래된 아담이다. 원래 아담이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일반명사이며, 특정한 개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아담, 즉 사람은 자웅동체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야훼 하나님은 본시 자웅동체인 사람 즉 아담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웅동체인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심심해 보이므로(2:18),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든 것이다(2:21~22). 그러니까 여자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분화된 것이다. 즉 아담(사람)에 내재하는 여성성이 객화된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여자의 분화야말로 인간의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고 역사의 시원이었다.

 

동양적 세계관에서는 남자와 여자는 태극의 양면으로서 태초로부터 동등하게 존재하였다. ()은 밭[]과 보습[]의 상형자를 합친 회의자(會意字)로서, 쟁기로 밭을 가는 힘센 일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남성성인 아니무스의 모든 속성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는 하늘하늘 굽이굽이 날씬한 이미지를 형상화한 글자라 하기도 하고, 무릎 꿇고 애기 낳는 생산의 모습의 상형이라고도 풀이된다. ()라는 글자에 젖을 강조하면 두 젖꼭지가 나타나는 모()라는 글자가 된다. 하여튼 이것도 인류의 아니마 관념을 상징하는 총체적인 한 아키타입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말을 보면, 창세기적 세계관이 영어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남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man)’이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man)은 곧 남자(man)이고, 남자는 곧 사람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여자는 우맨 (woman)’일 뿐이다. ‘우맨이란, ()와 남()이 독자적인 음·양의 구현체로서 엄존하는 것과는 달리, ‘에 종속되는 개념이다. ‘우맨(woman)’위프맨(wifman)’이라는 고대영어(OE)에서 왔는데, 위프(wif)와 맨(man)의 합성어이다. ‘우맨은 맨의 배우자로서, 즉 성교의 짝으로서 분화된 종속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맨은 맨의 불완전한 형태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여성은 어떠한 속성의 결여이며, 그 결여 덕택에 여성은 여성이 될 뿐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도 바울에게도 명료하게 나타나고 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남자는 머리에 베일을 덮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하여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드러낼 뿐이므로 머리를 가려야 한다. 남자는 원래 여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여자가 바로 남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남자는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며 여자야말로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고전 11:3~9).

 

 

오늘날 인권운동가나 여성운동가가 접하면 격분해야 할 이러한 바울의 메일 쇼비니즘(male chauvinism, 남성우월주의)은 사실 유대인 남자의 평범한 상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초기기독교운동은 과연 이러한 쇼비니스틱한 바울의 수준에서 전개된 부활 신화운동이었을까?

 

그러나 놀라웁게도 도마복음서는 우리에게 원시기독교의 사상이 결코 이렇게 유치한, 메일 쇼비니즘의 권위주의를 표방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도마공동체 사람들은 남자 속에 하나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한다면 여자 속에도 똑같이 하나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공재한다고 믿었다. 맨에서 우맨이 분화된 것은 불완전한 상태이므로 다시 원래의 아담, 원래의 맨, 원래의 사람으로 회복될 때만이 우리 인간의 몸은 온전하게 된다고 믿었다. 이 온전한 자웅동체, 즉 합체불(合體佛), 즉 고양된 인간의 의식 속에서 나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합일되는 엑스타시야말로 온전한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도마복음서 22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과 남성을 하나된 자(a single one)로 만들어라. 그리하여 남성이 남성이 되지 않고, 여성이 여성이 되지 않게 할지어다.

 

 

여기 22장에서 말하는 하나된 자와 본장 즉 43절의 하나된 자는 동일한 어휘를 사용한 동일한 표현이다. 바로 이 하나된 자라는 말을 바르게 해석할 때만이 제4장의 수수께끼들이 술술 풀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크로쌍은 말한다: “마태와 누가복음에 이미 들어있는 텍스트인 큐복음서만 해도 종말을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의 완벽한 세계를 미래에 투사시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그 반대의 길을 선택하고 있다. 도마는 온전한 시작(a perfect beginning)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묵시를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초적 낙원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이 현재 세계의 정상적 틀 속에서 창조의 여명으로(the dawn of creation) 되돌아 가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Unearthing the Lost words of Jesus 96), 적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도마기독교의 성지 우르파의 전경, 에데사(Edessa)라는 이름은 알렉산더 대왕이 자기 고향 마케도니아에 있는 지명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것이다. 내가 서있는 곳은 아브라함이 살해될 뻔한 니므롯성채인데, 니므롯왕의 전설은 창세기 10:8~12에도 나온다. 니므롯왕이 이 두 기둥 사이에서 대관식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현존하는 성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오랜 시간의 누적을 거쳐 만들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기둥은 코린트양식, 예수를 초청한 아브가르 우카마왕도 이곳에서 우리의 주인공 도마를 접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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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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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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