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를 깨달은 사람이 쓴 시엔 깊은 뜻이 담긴다
김시습하면 우리에겐 『금오신화』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특이한 그의 이력으로 또 한 번 알려져 있기도 하다. 신동(神童)이라는 내용의 삼각산 이야기와 함께 홍만종도 김시습의 이야기를 실었고, 위에 언급한 이수광도 김시습의 이야기를 잘 실어놨다.
그만큼 김시습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에게 회자가 될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고 그만큼 많이 알려진 얘기였다는 것이리라.
終日芒鞋信脚行 | 종일토록 짚신 신고 발 가는 대로 다녀 |
一山行盡一山靑 | 한 산이 건너 다하면 다시 한 산 푸르네. |
心非有想奚形役 | 마음이란 상상조차 없으니, 어찌 형체의 부림을 당하랴. |
道本無名豈假成 | 도란 본디 무명이니 어찌 빌려서 이루겠는가?(도를 얻은 척 할 수 없다) |
宿露未晞山鳥語 | 묵은 이슬이 마르지 않았는데도 산새는 우짖고 |
春風不盡野花明 | 봄바람 계속 부니 들꽃은 환하다. |
短笻歸去千峯靜 | 짧은 지팡이 짚고 돌아오노니, 온갖 봉우리들 고요하고 |
翠壁亂烟生晩晴 | 푸른 절벽의 어지러운 안개, 저녁햇살 속에 비치네. 『梅月堂詩集』 卷之三 |
『소화시평』 권상63번의 「증준상인(贈峻上人)」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도가적인 색채가 짙게 배어 있으며 은둔자의 모습을 잘 담고 있는 시였으니 말이다.
수련(首聯)과 함련(頷聯)은 바로 그런 도가적인 색채를 제대로 담았다. 근데 재밌는 점은 그 이후에 있었다. 그 이후에 묘사되는 것들이 단순히 그저 소요(逍遙)하는 모습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간밤 이슬 마르지 않았는데 산새가 우짖을 때 산보를 나왔다. 걷다 보니 봄바람 불고 들꽃은 아주 환하게 보인다. 짧은 지팡이를 잡고 걷고 걷는데 고요하기만 하다. 그때 푸른 절벽의 어지러운 안개가 저녁햇살에 반사되어 환하게 보인다.’ 이렇게만 묘사하고 나면 특별할 것 없는 소요하는 이의 심경을 담은 시가 된다. 그러니 수련과 함련이 백미라는 평가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다. 이 구절만큼 김시습을 제대로 보여준 장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만종의 ‘도를 깨친 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말을 하랴[非悟道者, 寧有此語].’라는 평가가 아주 제대로 된 평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경련(頸聯)과 미련(尾聯)을 빼면 말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전혀 다른 생각을 전해줬다. 여기서 평가하는 ‘도를 깨우친 자’라는 평가는 수련과 함련 때문이 아니라, 경련과 미련 때문에 내릴 수 있던 평가라는 얘기다.
5구의 시간은 새벽 시간대고, 6구는 낮 시간대이며, 7~8구는 저녁 시간대다. 즉 이 4구의 시로 하루를 온전히 표현했다는 얘기다. 그건 마치 인간에 대한 통찰을 담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넌센스 퀴즈 중에 ‘아침엔 발이 4개 점심엔 발이 2개 저녁엔 발이 3개인 것은?’이라는 게 있다. 그 정답은 바로 사람인데, 어렸을 때 인간은 4발로 기어 다니고, 커선 두 발로 직립해서 걷다가, 늙어선 지팡이를 짚기에 3발이 된다. 이처럼 이 시도 하루라는 시간을 5~8구의 시간 변화를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宿露未晞山鳥語 | 새벽 |
春風不盡野花明 | 낮 |
短笻歸去千峯靜 | 저녁 |
翠壁亂烟生晩晴 |
이 시도 이처럼 생각할 만한 여지가 있다. 새벽엔 어릴 때의 비유로 볼 수도 있고, 점심엔 젊은이의 비유로, 저녁엔 늙은이의 비유로 읽을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교수님은 이 테마 자체가 ‘자연순응’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바로 그런 점을 알았기 때문에 홍만종은 ‘도를 깨우친 자’라는 평을 한 것이다. 이 시는 그래도 좀 더 제대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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