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곤궁할 때 드러나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
凡四十一章.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陳, 去聲.
○ 陳, 謂軍師行伍之列. 俎豆, 禮器.
尹氏曰: “衛靈公, 無道之君也, 復有志於戰伐之事, 故答以未學而去之.”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從, 去聲.
○ 孔子去衛適陳. 興, 起也.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見, 賢遍反.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何氏曰: “濫, 溢也. 言君子固有窮時, 不若小人窮則放溢爲非.”
程子曰: “固窮者, 固守其窮.” 亦通.
○ 愚謂聖人當行而行, 無所顧慮. 處困而亨, 無所怨悔. 於此可見, 學者宜深味之.
해석
凡四十一章.
모두 41장이다.
衛靈公問陳於孔子. 孔子對曰: “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 明日遂行.
위령공이 진법(陣法)을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께서 “제사 때 쓰는 제기(祭器)들을 진설(陳設)하는 것은 일찍이 들었지만, 군대의 일은 배우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시고, 다음 날 떠나셨다.
陳, 去聲.
○ 陳, 謂軍師行伍之列.
진(陳)은 군대의 대열에 대한 것을 말한다.
俎豆, 禮器.
조두(俎豆)는 제사 때 쓰는 그릇이다.
尹氏曰: “衛靈公, 無道之君也,
윤순(尹淳)이 말했다. “위령공은 무도한 군주인데
復有志於戰伐之事,
다시 전쟁과 정벌하는 일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故答以未學而去之.”
배우지 못했다고 대답하고서 떠나셨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의 첫 장(章)이다. ‘위령공’ 편은 수신(修身)과 처세(處世)에 관한 내용이 많다. 공자는 기원전 495년 위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위나라 영공과 대면한 듯하다. 당시 영공은 무도(無道)한 데다가 진(晉)나라와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영공은 진나라에 원한을 갚을 생각에서 공자에게 진법을 물었다. 공자는 답변을 회피했다. 예법의 일은 알고 있다고 말하여 영공의 무도함을 풍자(諷刺)한 듯도 하다.
진(陳)은 진(陣)의 옛 글자로 군대가 대오(隊伍)를 이루는 구조를 말한다. 조두(俎豆)의 조(俎)는 희생물을 신 앞에 바치는 대(臺), 두(豆)는 나무로 만든 제기이다. 조두지사(俎豆之事)는 제례(祭禮)나 예법(禮法)를 대유(代喩)한다. 즉(則)은 주어에 해당하는 어휘를 강조한다. 상문지(嘗聞之)는 일찍이 들었다는 말인데, 배운 적이 있다는 뜻이다. 군려(軍旅)의 군(軍)은 1만2500명의 병사, 려(旅)는 500명의 병사로 이뤄진 군단(軍團)이다. 미지학(未之學)의 지(之)는 앞에 나온 군려지사(軍旅之事)를 대신한다. 짧은 부정문의 빈어가 대명사라서 빈어가 동사 앞으로 나왔다.
공자는 노(魯)나라가 제(齊)나라와 회합할 때 노나라 제후에게 무력을 갖추라고 제안했고, 제나라 군주가 시해되자 노나라 제후에게 범인을 토벌하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무도한 영공에게 군사의 일을 일러주면 재앙이 닥치리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군사의 일은 배운 적이 없다고 둘러말했다. 아무리 좋은 계책이라도 그것을 시행할 인물의 됨됨이와 그것을 실현할 시기의 적부(適否)를 살펴서 건의해야 할 것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진나라에서 곡식이 끊겨 따르던 이가 병이 들었고 일어나지조차 못했다.
從, 去聲.
○ 孔子去衛適陳.
공자는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갔다.
興, 起也.
흥(興)은 일어난다는 것이다.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자로가 화를 내며 “군자도 또한 곤궁합니까?”라고 물으니,
見, 賢遍反.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공자께서 “군자는 본디 곤궁하니, 소인은 곤궁하면 넘쳐 잘못까지 저지른다.”라고 말씀하셨다.
何氏曰: “濫, 溢也.
하안(何晏)이 말했다. “람(濫)은 넘친다는 것이다.
言君子固有窮時,
군자는 본래 곤궁한 때가 있으나,
不若小人窮則放溢爲非.”
소인은 곤궁하면 멋대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는 같지 않다라는 말이다.”
程子曰: “固窮者, 固守其窮.”
정이천(程伊川)이 말했다. “본래 곤궁한 것은 진실로 그 궁함을 지키는 것이라 했다.”
亦通.
또한 통한다.
○ 愚謂聖人當行而行, 無所顧慮.
내가 생각하기로 성인은 마땅히 행할 때 행하여 돌아보고 염려하지 않아
處困而亨, 無所怨悔. 於此可見,
곤궁함에 처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學者宜深味之.
배우는 이는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한다.
○ 인간 의지와 현실 상황은 어긋나는 일이 많다. 그렇기에 크고 올바른 뜻을 지닌 군자일수록 본시 곤궁하다. 이것을 군자고궁(君子固窮)이라 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의 이 장(章)에서 나왔다.
‘사기’에 따르면, 공자는 노나라 애공(哀公) 6년인 기원전 489년에 위(衛)나라를 떠난 후,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거쳐 초(楚)나라로 향했다. 당시 진(陳)은 초(楚)에 굴복하고 채(蔡)는 오(吳)에 굴복한 상태였고 오(吳)와 초(楚)는 전쟁을 반복했다. 그런데 진(陳)과 채(蔡)의 대부(大夫)들은 모두, 초나라가 공자를 등용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하리라 여겨 사람들을 보내 들판에서 공자 일행을 포위했다. 양식이 끊어져 굶주린 제자들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자로(子路)는 불만을 품고서 공자를 뵙고는 “군자라도 이토록 곤궁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항의했다.
흥(興)은 일어섬, 온은 불만을 품음, 현(見)은 윗사람을 알현함이다. 사(斯)는 ‘이에’의 뜻을 지닌 접속사다. 남(濫)은 넘쳐날 일(溢)과 같다.
의지와 상황이 어긋나 곤궁하게 되었을 때 군자와 소인은 처신의 방식이 전혀 다르다. 군자는 곤경에 처해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아 결국 형통(亨通)한다. 소인은 곤궁하면 방일(放逸)하여 못된 짓을 저지른다. 그래서 정이(程頤)는 고궁(固窮)을 ‘곤궁을 고수(固守)한다’로 풀이하기까지 했다. 곤경 속에서도 염치를 잃지 않는 일, 그것이 곧 군자의 형통을 배우는 길이 아니겠는가.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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