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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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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남인도가 무대였지만, 영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전투가 벌어진 플라시는 인도 동북부 벵골의 한 지방이었다(영국은 이미 전쟁 전부터 벵골의 중심지인 캘커타[2000년 콜카타로 이름을 고침]에 진출해 있었다). 이는 곧 전후 영국의 지배가 남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실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한낱 30대 초반의 병참장교에 불과한 클라이브의 공적만이 아니었다. 당시 벵골의 장군이었던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는 벵골의 태수 자리를 노리고 영국을 적극 지원했다. 현직 태수와 미르 자파르의 싸움은 곧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벵골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았다.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자연히 미르 자파르는 현직 태수를 누르고 벵골의 새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르 자파르가 애초에 원한 태수 자리와 너무도 달랐다. 이미 벵골의 실제 새 주인은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는 영국군에 상당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했고(실제로는 그가 영국의 용병인 셈인데, 명분상으로는 엉뚱하게도 그가 자신의 쿠데타를 위해 영국군을 고용한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인도회사에 캘커타 인근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예상과 다른 현실에 좌절한 미르 자파르는 태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동인도회사는 후임으로 미르 카심(Mir Kasm)을 앉혔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 측의 판단 착오였다. 미르 카심은 취임한 초기에 동인도회사에 영토를 양도하는 등 고분고분하게 행동했으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는 이내 관세 수입을 놓고 동인도회사와 엇각을 빚다가 1763년 동인도회사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판단 착오였다. 그는 결국 패배하고 벵골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미르 카심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그는 벵골 서쪽의 오우드(oudh), 무굴과 손잡고 벵골을 탈환하기 위해 영국에 재차 도전했다. 이 북사르 전투는 북인도의 거의 모든 토착 세력이 힘을 합쳐 영국에 도전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또다시 참패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벵골을 방어하는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북인도 전역을 제패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도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마라타뿐이었다. 무굴 제국의 후예로 자처하던 마라타는 당시 인도의 여느 나라들과 달리 상당한 강국이었으나 영국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마라타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동인도회사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너무 손쉽게 남인도에 이어 북부의 벵골까지 손에 넣은 동인도회사가 소화불량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벵골은 이제 영국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아예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비록 벵골을 먹었다고 해도, 또 아무리 국책회사라고 해도 동인도회사는 어디까지나 회사일 뿐이었다.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동인도회사는 영국 최초의 주식회사였다)가 한 나라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65년 벵골 지사로 취임한 클라이브는 이중 통치 제도를 시행했다. 겉으로는 기존의 통치 기구를 그대로 둔 채 안으로는 경제 관료들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이익을 빼내는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인도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최대한의 실익을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외세와 결탁한 미르 자파르 플라시 전투가 끝난 직후 미르 자파르가 클라이브와 만나는 모습이다. 미르 자파르는 영국군을 끌어들여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이용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이용당한 것은 그였다. 민족의식과 통일 의지가 없었던 당시 인도 역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처음 몇 년간은 만사가 순조로웠다. 영국에서는 인도에서 돈을 많이 벌어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상류층의 파티에서도 인도 이야기가 단골 화제로 올랐다. 그러나 회사 직원이나 인도에 파견된 회사 소속의 군인들이 그랬다는 것이고, 회사 자체는 사정이 달랐다. 동인도회사는 예전에는 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면, 이제는 세 수입을 더 노리게 되었다. 이것은 주식회사의 업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수익을 낳는 분야가 늘었으니 회사의 재정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은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개인적인 부만 쌓았으므로, 회사 전체의 이익은 예상만큼 크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경비만 늘어났다. 급기야 동인도회사는 큰 적자를 내게 되었고, 은행 융자로 적자폭을 메우는 전형적인 부실기업으로 변했다. 그렇잖아도 회사에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국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노스 규제법(노스North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다)을 제정해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박탈했다. 이때부터 인도 통치권은 영국 정부로 귀속되었다. 아울러 동인도회사 소속의 회사원신분이던 벵골 지사는 총독이라는 공무원신분으로 바뀌면서 마드라스와 봄베이(지금의 뭄바이)까지 통필하게 되었다. 이제 영국은 이중 통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정식으로 식민지 지배에 나선 것이다.

 

어쨌든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북인도는 통일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무굴 제국이 쇠약해진 18세기 중반 이후 분열 상태에 빠진 북인도를 영국이 다시 통일해준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인도인들은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가운데 어느 쪽을 더 반겼을까?

 

 

캘커타의 인도 총독부 벵골을 정복한 영국은 캘커타에 식민지 총독부를 세우고 직접 지배에 나섰다. 이제 인도는 영국의 경제적 지배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까지 받는 정식식민지로 전락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다

식민지적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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