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최후의 세력을 꼽자면 마라타가 있었다【실은 카르나타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인도에는 영국에 당당히 맞선 나라가 있었다. 마이소르(Mysore)라는 왕국이었다. 마이소르는 특히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지배하던 18세기 후반에 남인도에서 영국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일찍부터 영국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하이데르와 티푸는 군대를 근대화하고 내정을 개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당시 인도인으로서는 드물게 국제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인근의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특히 티푸는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스로 자코뱅당에 가입하는 등 특이하다 할 만큼 세계사의 흐름에 밝았다. 그러나 동맹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무래도 소국인 마이소르는 1799년 영국의 총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했다】. 마라타는 무굴 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무굴의 뒤를 이어 인도의 통일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였다. 비록 파니파트 건강에서의 패배로 한때 주춤했으나 마라타는 거뜬히 세력을 회복하고, 북사르 건투에서 영국이 무굴 제국을 복속시키는 와중을 틈타 델리 지역까지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국에서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문턱은 상당히 높았다. 그냥 ‘큰 나라’와 통일 제국의 차이는 중심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달려 있다. 강력한 중심이 없었던 마라타는 영토가 늘어나면서 통일은커녕 오히려 분열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정복 전쟁에 참여한 지휘관들이 새로이 병합한 지역에 아예 눌러앉아 거의 독립 군주처럼 행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라타 본국에 반기를 들지 않고 적극 협조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마라타는 일종의 연합 형태가 되어 마라타 동맹이라 불리게 된다.
마라타 동맹이 강성해지자 영국과의 한판 승부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양측 사이에서 오우드가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충돌은 다시 지연되었다. 영국은 북사르 전투 이후 오우드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영국의 영향력 아래 그냥 놔두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으로서는 오우드를 정복하는 것보다 벵골의 내정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굳이 오우드를 병합해 대내외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오우드를 이렇게 처리한 것은 영국이 해외 식민지들을 개척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식민지 통치의 노하우였다. 또한 영국은 그 전쟁의 또 다른 패전국인 무굴 제국의 황제도 최대한 예우했다. 영국은 무굴의 황제에게 영지를 알선하고 연금까지 주었다. 그러나 그 제국주의적 노하우는 한계가 있었다. 무굴 황제는 그렇잖아도 유명무실한 존재로서 과거의 영화만 꿈꾸며 살고 있었는데, 아예 서방 적국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으니 심기가 편할 수 없었다. 때마침 마라타의 초대를 받자 그는 그 기회에 마라타가 장악한 델리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마라타와 영국 간에 감돌고 있던 전운이 더욱 짙어졌다】.
▲ 친일과 ‘친영’ 식민지 시대에는 본국과 결탁한 자들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지방 유력가들은 집에 영국군 장교를 초청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우리의 식민지 시대에 친일파는 민중에게 배척당했지만, 단일 국가라는 의식이 약했던 인도에서는 ‘친영파’라 해서 특별히 비난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저울의 균형은 잠시뿐이고 결국은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마라타 동맹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균형이무너졌다. 1775년 마라타의 권력 다툼에서 밀린 세력이 봄베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에 도움을 청하면서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영국은 인도에 진출한 이후 첫 패배를 기록했다.
전쟁의 결과가 충격적인 탓에 여파도 컸다. 전쟁에서 발생한 재정적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초대 벵골 총독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 1732~1818)는 완충국인 오우드를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본국에 송환되어 탄핵 재판을 받았다. 본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벵골 총독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 덕분에 헤이스팅스의 후임인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738~1805) 총독은 벵골의 내정에 개입해 상당한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3대 벵골 총독인 웰즐리(Richard Colley Welesley, 1760~1842) 때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영토 확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관심의 초점은 역시 마라타였는데, 이번에도 또다시 마라타의 내분으로 실각한 세력이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시작이 1차전과 비슷했던 탓인지 이 2차전에서도 영국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끝내 마라타를 정복하지는 못하고 흐지부지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오히려 이 전쟁으로 인해 인도 전역에서 반영(反英) 정서가 격화된 탓에 영국은 본전도 찾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행운의 연속으로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마라타가 지원하는 핀다리라는 도적 떼가 영국령까지 진출하자 1817년 영국은 이들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3차전을 일으켰다. 1ㆍ2차전 때처럼 우연한 계기로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닌 만큼 이번 전쟁은 종전과는 양상이 크게 달랐다. 비록 반영 감정이 들끓고 반영 연합까지 수립되었지만 애초부터 무력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마라타로서는 영국의 전면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이 재개된 지 몇 개월 만에 마라타 동맹은 해체되었다. 중부 인도 전역의 모든 왕국은 멸망하거나 영국의 군사 보호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했고 독립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의 세력권인 인더스 강 유역을 제외한 인도 대륙 전체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었다. 인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지 200여 년 만에 영국은 드디어 인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 합의된 내분 인도 제후들과 영국 측 인물들이 모여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영국은 마라타 동맹을 내분시켜 정복하려 했으며, 마라타 동맹의 일부 세력은 기꺼이 ‘내분되고자’ 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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