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치다 타츠루란 샘에서 길어 올린 물의 맛은?
어느덧 길고 긴 후기의 마지막 편을 쓰게 되었다. 들어가는 글을 쓸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첫 글을 쓸 때 “이 글은 ‘박동섭-우치다 타츠루’를 담은 프롤로그격(모두 5편 내지 7편으로 진행될 예정)의 글이다”고 밝혔으니, 무려 28편이나 더 쓰게 된 셈이다. 그때만 해도 강연 당 2편 정도로 후기를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은 다듬다 보니 내용이 늘어난 경우이고, ‘공생의 필살기’는 풀어내고 싶은 내용이 많아 저절로 늘어나며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그만큼 기본적인 생각과 엇나가는 부분들이 많아 그걸 자기화하여 표현하려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우치다 타츠루란 샘엔 어떤 물이 있을까?
우치다란 샘의 물을 긷다
들어가는 글은 ‘그대 앞에서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내용이었다. 우치다쌤을 2012년에 처음 알게 되어 책도 읽어보고 강연도 들어보고, 박동섭 교수가 올려준 짤막한 글들을 읽어봐도 ‘알쏭달쏭’하기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쏭달쏭하다고 관심을 접을 순 없었다. 인연이란 ‘나의 의지를 넘어선 어떤 관계의 장’이기에 내가 맺은 관계들이 우치다쌤을 계속 만날 수 있도록 이끌었고 앎이란 ‘시간을 보낸 만큼 알게 되는 것’이기에 무르익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교육은 공들인 것과는 다른 모양새로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되돌아오는 시스템입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자판을 두드리면 화면에 문자가 뜨는 게 아니라 사흘 후에 그림엽서가 도착한다든지 삼 년 뒤 호박을 두 개 받게 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게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흐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사를 춤추게 하라』 pp32”라는 말처럼 ‘도통 알 수 없는 흐름’의 우치다쌤을 시간과 공력을 들여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글은 우치다란 샘에서 물을 길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과연 우치다란 샘엔 어떤 물이 있었을까?
▲ 우치다 타츠루란 샘엔 어떤 물이 있을까?
우치다란 샘에 물은 없고 공허한 어둠만 있다
제주 강연을 시작할 때 우치다쌤은 “여러분이 태어나서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라고 강연의 목표를 확실히 천명했다. ‘한 번도 듣지 못한’이란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강연장엔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에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들어본 말일 수도 있고, 자신의 강연이지만 선배들의 지식을 받아들인 것이기에 오리지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강연을 정리한 소감을 말하자면, 그의 목표는 확실히 달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치다쌤의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유일무이한 얘기’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기괴한 이야기거나 황당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얘기인데도 접근방식이 다르다 보니, 생소한 얘기로 들린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처음 강연을 듣고 녹취록을 작성할 때만 해도 ‘이게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의 수준에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강연이었기 때문이다. 우치다란 샘에 얼마나 맛있고 신선한 물이 있나 열심히 길러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어둠만 긷고 말았다.
▲ 깊고 깊은 그 속엔 맑은 우물이 있었다.
공허한 어둠 그 끝에, 풍부한 맛의 물이 있다
시각적으로는 ‘가시광선’이, 청각적으로는 ‘가청주파수’라고는 게 있듯이, 인식적으로도 ‘인식 가능한 말’이 있을 것이다. 가시광선 너머의 빛은 보이지 않으며 가청주파수 너머의 파동은 들리지 않듯, 인식 가능하지 않는 말은 생각으로 남지 않는다. 예수가 여러 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외친 것도 알고 보면 ‘인식되지 않는 말’이 있다는 뜻일 게다.
하지만 기계의 도움을 받으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리기도 한다. 언젠가 이어폰 하나를 산 적이 있었다. 음악재생기와 음원은 그 전과 같았지만 이어폰 하나를 바꾸었더니, 그 전엔 들리지 않던 악기의 울림까지 선명하게 들리며 다른 노래처럼 들렸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인식되지 않는 말’도 들리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기계의 도움이 필요하다기보다 시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모르겠고 황당하다고 느껴지는 그 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제야 비로소 ‘인식되지 않는 말’이 깊은 울림이 되어 들리기 시작하니 말이다. 특히 ‘공생의 필살기’란 주제의 강연은 몸에 대한 인식, 자아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어 ‘당신 머릿속에 불변의 진리처럼 자리한 한국사회의 문법을 지워나갈 수 있는가?’라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우치다란 샘의 공허한 어둠 그 끝에 드디어 맑고도 시원한 물을 긷게 된 것이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어떤 종교적인 충격(‘새사람으로 거듭났네’류)과 같은 뉘앙스처럼 들릴 테지만, 전혀 그런 얘기는 아니다. 그저 예전엔 들리지 않던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들렸고, 그로 인해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니 말이다.
▲ 우치다란 샘에 있는 맑은 물을 마시고 싶으면 그를 보라. 그리고 그가 보는 세상을 함께 보라.
인용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
박동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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