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모르기에 배운다
그런 선빵 통역을 통해 우치다쌤의 말을 들으니, 한결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러고 보니 우치다쌤과 박동섭 교수는 여러 부분에서 비슷한 분위기가 있음을 알겠더라. 지식인이란 점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담았던) 교육자란 점 그렇다.
▲ 전주 강연에서의 모습. 여기선 동아시아의 교육이란 거대 담론을 다뤘다.
우치다쌤과 박동섭 교수의 공통점: 1. 전방위 지식인
그런 직업적인 공통점 외에 성향적인 부분에서 두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첫 번째는 전방위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우치다쌤에 대해서는 이번 후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전방위적인 지식인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레비나스를 비롯한 유럽 철학자들의 책을 여러 권 번역했으며, 국제 정세에도 정통하고, 무도에도 깊은 조예가 있어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박동섭 교수는 2011년 공간 민들레에서 있었던 ‘비고츠키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되었는데, 그 강의는 학구적인 강의(아카데믹하여 지루한 강의)였음에도 매시간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더욱이 예로 드는 것들이 영화의 한 장면(‘진 1기’, ‘굿 & 바이’)을 보여준다던지, ‘내 집 안에 그랜드 피아노 들여놓기’라는 메타포를 사용한다던지, ‘중증장애인 마리의 요리 만들기’라는 다큐 내용을 알려준다던지, ‘게재불가’된 논문 내용을 보여준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스펙터클하게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강의는 ‘어렵지만 재밌고, 깊지만 흥미진진하다’는 평이 가능했다.
박동섭 교수는 매체를 잘 이용하여 재밌는 강연을 하고 우치다쌤은 매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 담백한 강연을 한다는 차이는 있으나, 두 분 모두 문사철이 하나로 어우러져 다양한 예를 통해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 제주 강연에선 공생의 필살기라는 마치 우리 삶에 배어 있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우치다쌤과 박동섭 교수의 공통점: 2. 해답을 듣고 싶거든 점쟁이를 찾아가라
두 번째 공통점은 강의 하는 스타일에 있다.
박동섭 교수의 강연 말미에 필수적으로 나오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현장에선 어떻게 적용하라는 건가요?”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럴 때마다 박동섭 교수는 반복되는 레퍼토리 같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고츠키 이론은 교육 현장에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한다. 하나의 이론으로 고정시키는 순간, 또 다시 비고츠키를 왜곡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사회와 교육이 얽히고설켜 있기에 문제를 단순화시켜 생각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인데, ‘그래서 어찌 해야 하나요?’라고 방법적인 차원에서만 질문을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박동섭 교수는 ‘공생의 필살기’ 강연 질의응답 시간에 “그 아파트엔 자기가 좋아하는 자아도 있고, 싫어하는 자아도 있는데 싫어하는 자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듣고 “왜 사람들은 어떤 논건이 나와도 저런 식으로 뭔가 방법론적으로 매달리고 마는 것일까?”라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박동섭 교수가 보였던 이런 기풍이 우치다쌤에게도 그대로 엿보인다는 점이다. 우치다쌤은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게 늘 ‘~하라’는 식의 말이 아닌, “제가 지금까지 들려드린 이야기는 사회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였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그건 곧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완벽한 해결책인양, 교육의 문제를 해결할 처방전인양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학생을 직접 만나는 사람으로서 ‘~하라’ 식의 직접적인 처방을 듣고 싶어 그 자리에 참석했는데, ‘~하라를 기대하셨으면 실망을 안고 가세요’라는 식으로 강연을 끝맺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박동섭 교수든 우치다쌤이든 미완의 강연(강연이 흐지부지되었단 뜻이 아니라, 방법론적 처방을 하지 않는 강연이라는 뜻)을 하기를 좋아한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정답이 있는 강연’을 할 수 없기에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현실의 한계와 가능성을 자각하게 하고 스스로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그래서 강연이 끝나는 순간 무언가 알게 되었다는 개운한 마음이 들기보다 더 혼란스러워지고 답답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생각의 가능성이 열리기에 맘껏 상상하고, 맘껏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걸 테다.
▲ 존경하면 닮아지고 함께 있어도 여러 영향을 받게 된다.
모르기에 배운다
그렇다면 우치다를 왜 배워야 하는 걸까? 아니 난 왜 우치다를 배우려 애쓰는 걸까? 우치다쌤이 대학교에 몸을 담았다고 해서 교육에 있어서 전문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곧 학교에 있는 교사라 할지라도 교육 전문가가 아닌 것과 매한가지다. 그 현장의 여러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삶에 대해 돌아보지 않으면 기껏 해봐야 ‘수업 기술자’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치다쌤은 여러 상황에 대해 생각해본 사람이며, 삶에 대해 돌아본 사람이기에 배우고 싶었다.
그가 쓴 『스승은 있다』라는 책은 오히려 ‘교육’이란 단어의 틀에 갇히지 않은 ‘가르침과 배움’의 역동적인 흐름을 제대로 보여줬고, 『교사를 춤추게 하라』는 교사로서의 대의명분을 해체시킴으로 교사의 자부심을 세워줬다. 역설로 가득 차 있지만, 어찌 보면 그게 삶이며 그의 책은 바로 그런 부분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기에 감탄하며 읽을 수 있었다.
이번 강연도 역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만큼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줬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거나 그 이상의 노력을 멈췄을 때, 그 사람의 성숙은 끝이 납니다. 계속 성숙하고 싶으면 다른 것이 실은 똑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깊은 구멍을 파는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우치다쌤의 말처럼 ‘다른 것이 실은 똑같은 것’을 알게 될 때까지 우치다란 샘에서 물을 길어볼 생각이고 우치다를 배워볼 생각이다.
이 후기를 통해 우치다 타츠루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거나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긴장하지 말고 그냥 모르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나오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깊은 구멍을 파서 어떤 물이 있는지 길어보면 된다. 2주간의 고군분투를 뒤로하며 여기서 전주-제주 강연의 후기를 마칠까 한다.
▲ 강연이란 이 공간을 꽉 채우는 게 아니라, 이 공간의 여백을 존중하고 여백을 남겨두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인용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
박동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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