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온갖 돈을 다쓰고 나서야 기녀에게 무시당한 한생
한생병필(韓生秉筆)
古阜郡有一妓, 忘其名, 申高靈奉使時, 所情種者. 故隨之京師, 奉巾四年, 高靈悶其懷土而暫許歸寧. 妓還家積日, 淫聲稍著.
有勳孽姓韓者, 姿容淸秀, 風流蘊藉. 嘗徵貢布八九駄, 托於古阜而, 投宿妓家. 感妓之美貌, 留連忘返則妓亦悅生之標致. 又見行齎之頗贍, 響應而甚幸之, 昵愛相篤, 誓死綢繆.
生淹延數月, 罄湯所持, 若將終身, 無所持, 奈何? 語曰: “思念之切, 當示肝膈, 言與心違, 有如皎日.” 妓曰: “然則當以某事, 示之乎?” 生曰: “渠之狎客必多, 胸中自有涇渭, 渠可等級之, 我當筆之.” 妓曰: “諾.”
生涉筆臨紙, 聽其所言, 妓依枕良久曰: “長城鄕吏李淸, 其甲也; 光州甲士林萬孫, 其乙也.” 生又請丙, 妓曰: “申高靈有功, 不可不書, 校生朴命春ㆍ嶺南行客吳弼 可丁, 可戊.” 生又問己, 妓曰: “君秉筆則, 亦不可闕名也.” 生喪膽垂頭, 卽以單童匹馬, 丐食還鄕.
史臣曰: “甚矣! 娼女之術也. 以韓之風流, 豈下於鄕吏甲士而初利其財, 委身事之, 財旣盡然後, 赦而逐之則豈如是沒人情之人乎?”
해석
고부군(古阜郡, 부안군 백산면 일대)에 한 기녀가 있는데 그 이름은 잊었는데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가 사명(使命)을 받았을 적에 애정을 나눈 이였다.
故隨之京師, 奉巾四年, 高靈悶其懷土而暫許歸寧.
그런 까닭으로 서울에 따라와서 건즐【건즐(巾櫛): 목욕하는 도구이므로, 건즐을 잡는 것은 바로 처첩(妻妾)의 일에 해당한다.】을 받든 지 4년에 신고령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걸 가엾게 여겨 잠시 고향에 돌아갈 걸【귀녕(歸寧): 보통 부인이 친정 집에 가서 문안하는 것을 가리킨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갈담(葛覃)」에 “돌아가서 부모를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고 하였다.】 허락했다.
妓還家積日, 淫聲稍著.
기녀가 집으로 돌아간 날이 지날수록 음란한 소문이 점점 드러났다.
有勳孽姓韓者, 姿容淸秀, 風流蘊藉.
어떤 공훈(功勳) 집안의 서얼(庶孼)인 성이 한씨인 사람은 모습이 청아하고 빼어나며 풍류를 알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嘗徵貢布八九駄, 托於古阜而, 投宿妓家.
일찍이 공물인 삼베 8~9 바리를 징수하여 고부에 맡기고 기녀의 집에 투숙했다.
感妓之美貌, 留連忘返則妓亦悅生之標致.
기녀의 미모에 감탄하여 연거푸 유숙(留宿)하며 돌아가길 잊으니 기녀 또한 한생의 풍취를 좋아했다.
又見行齎之頗贍, 響應而甚幸之, 昵愛相篤, 誓死綢繆.
또한 가져오는 것이 매우 넉넉한 걸 보고는 호응[響應]하며 몹시 그를 사랑하니 사랑함이 서로 진실해져 죽음을 무릅쓸 만큼 싸고 돌았다[綢繆].
生淹延數月, 罄湯所持, 若將終身, 無所持, 奈何?
한생은 오래도록 수개월을 연이어 가진 것을 다하고 탕진하며 ‘만약 종신토록 가진 게 없으면 어찌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다.
語曰: “思念之切, 當示肝膈, 言與心違, 有如皎日.”
기녀에게 “생각함의 간절함은 마땅히 진심[肝膈]을 보여줘야 하니 말과 마음이 어긋나는 건 밝은 해처럼 명명백백 드러나리”라고 말했다.
妓曰: “然則當以某事, 示之乎?”
기녀가 “그렇다면 마땅히 어떤 일로 그걸 보여주어야 하나요?”라고 말했다.
生曰: “渠之狎客必多, 胸中自有涇渭, 渠可等級之, 我當筆之.”
한생이 “그대가 친한 손님이 반드시 많겠지만 가슴 속엔 스스로 우열【경위(涇渭): 탁한 경수(涇水)와 맑은 위수(渭水)라는 말로, 경수(涇水)는 흐리고 위수(渭水)는 맑으므로 인물의 우열(優劣)과 청탁(淸濁)이나 사물의 진위(眞僞)와 시비(是非)를 가리킨다.】이 있을 테니, 그대가 그들을 등급지어주면 내가 마땅히 그걸 기록하겠소.”라고 말했다.
妓曰: “諾.”
기녀가 “허락하겠어요.”라고 말했다.
生涉筆臨紙, 聽其所言, 妓依枕良久曰: “長城鄕吏李淸, 其甲也; 光州甲士林萬孫, 其乙也.”
한생이 붓을 쓰고 한지를 가져다 말하는 것을 들으려 하는데 기녀는 베개에 기댄 채 오래 있다가 “장성 향리【향리(鄕吏): 고려와 조선 시대, 한 고을에서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중인 계급의 관리를 말한다】인 이청이 첫 번째고 광주 무관[甲士]인 임만손이 두 번째예요.”라고 말했다.
生又請丙, 妓曰: “申高靈有功, 不可不書, 校生朴命春ㆍ嶺南行客吳弼 可丁, 可戊.”
한생이 또 세 번째를 청하니 기녀가 “신고령께선 공이 있기에 쓰지 않을 수 없고 교생【교생(校生): 조선 시대, 지방 향교나 서원에 다니는 생도를 이르던 말이다】인 박명춘과 영남의 나그네인[行客] 오필이 네 번째일 만하고, 다섯 번째일 만해요.”라고 말했다.
生又問己, 妓曰: “君秉筆則, 亦不可闕名也.”
한생은 또한 자기에 대해 물으니 기녀가 “그대가 붓을 잡고 있으니 또한 이름을 뺄 수는 없어요.”라고 말했다.
生喪膽垂頭, 卽以單童匹馬, 丐食還鄕.
한생이 상심하고 머리를 떨군 채 곧바로 동복(童僕) 한 명과 한 필의 말을 가지고 걸식하며 고향으로 돌아갔다.
史臣曰: “甚矣! 娼女之術也.
사신이 논평했다. “심하구나! 창녀의 재주라는 게.
以韓之風流, 豈下於鄕吏甲士而初利其財, 委身事之, 財旣盡然後, 赦而逐之則豈如是沒人情之人乎?”
한생의 풍류스러움을 어찌 향리와 문관보다 하찮게 여기고 처음엔 재물을 이롭게 여겨 몸을 맡겨 섬기다가 재물이 이윽고 소진된 후엔 채찍질하며 그를 쫓아냈으니 아마도 몰인정한 사람이리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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