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전국시대(戰國時代)
1. 정세와 위나라의 오기(吳起)
① 정세
1. 진(晉)의 실권이 대부에게 넘어가 BC 453년에 조(趙)ㆍ위(魏)ㆍ한(韓)으로 분열됨.
2. 전국칠웅(戰國七雄)이 등장했고 위(魏)ㆍ제(齊)ㆍ진(秦) 세 나라가 가장 강국이었음.
② 상황
위(魏)가 제(齊)의 서쪽,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을 공략, 초(楚)의 황하 이남을 차지함.
③ 공자의 제자 자하의 문하생인 오기(吳起)의 오기(傲氣)
오기의 이동 동선 위(魏)⇒노(魯)⇒위(魏)⇒초(楚)
1. 위(魏) 출신으로 등용되길 바랐으나 되지 않자 30명을 죽이고 ‘등용되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떠나, 노(魯)에서 관직을 얻음.
2. 제(齊)가 노(魯)를 공격할 때 노(魯)의 장군으로 등용하려 했으나 오기의 부인이 제(齊) 출신이기에 망설임. 그러자 오기는 자기의 부인을 손수 죽이고 등용되어 공을 세움.
3. 그럼에도 노(魯)의 불신은 계속 되자 위(魏)로 가서 위문후(魏文候)【자하의 이념적 틀 속에서 전국시대의 새로운 합리주의적 정신을 개척하였고 제자백가가 노방하는 정학협동의 기풍을 열어 위를 전국시대의 주축으로 만드는 기틀을 닦았다. 양혜왕은 그의 손자다】에게 등용됐으며 그곳에서 말단병사와 함께 생활하며 진(秦)의 다섯 성을 함락함.
4. 문후가 죽고 무후가 등극하자 그의 재상 공숙좌의 시기와 질투로 불신임되어 초(楚)로 건너감.
5. 초도왕(楚悼王)에 등용되어 초를 강하게 만들었으나 도왕으로 죽음으로 반대파에 공격당하게 됨.
6. 오기는 도망가 도왕의 주검 옆에 엎드렸으며 도왕의 유해에도 화살이 꽂히게 함으로 죽는 순간까지 ‘임금의 시신에 화살을 쏜 자는 처벌을 받는다’는 법을 통해 ‘복수의 병법’을 활용함.
2. 손빈과 방연, 그리고 마릉전투
① 방연의 질투심
1. 방연(龐涓)과 손빈(孫臏)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손자는 춘추시대의 손무(孫武)임, 동일 인물 아님】은 동문수학했으나, 방연이 위혜왕(魏惠王(맹자에 나오는 양혜왕과 동일 인물)에게 등용되어 손빈을 간첩으로 몰아 앉은뱅이로 만든 후 가둠.
② 두 번의 복수전을 감행한 손빈
1. 손빈은 제(齊)에서 온 사신의 수레를 타고 탈출했으며 제(齊)의 장군 전기(田忌)의 빈객으로 능력 발휘를 하여 왕에게 추천되도록 함.
2. 위(魏)가 조(趙)를 침략하자 조(趙)는 제(齊)에 구원을 요청함(魏 VS 趙ㆍ齊). 손빈은 비어있는 위(魏)를 치도록 하여 대승을 거둠(1차 복수).
3. 13년 후에 위(魏)와 조(趙)가 한(韓)을 침략하자 한은 제(齊)에 구원을 요청함(魏ㆍ趙 VS 韓ㆍ齊). 2차전이 시작됨.
4. 방연은 13년 전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왔지만 이미 손빈은 후퇴한 후였음.
5. 쫓아가니 서서히 부뚜막 수가 줄어드는 걸 보고 제(齊)의 병사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고 안심하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게 됨. 결국 마릉(BC 341)에서 역공을 당해 죽음.
6. 손빈은 위(魏)의 남은 군대를 격파하고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아 귀국함(위나라 몰락의 계기).
3. 상앙(商央)의 변법개혁
① 진(秦)을 변법으로 바꾸다
1. 상앙(商鞅)은 위(魏)에서 태어났으며 위앙(魏鞅) 또는 공손앙(公孫鞅)으로 불려 오기를 내쫓은 공숙좌(公叔座)의 밑에서 일함.
2. 위혜왕(魏惠王)에게 등용될 수 있었으나, 위혜왕은 너무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다하여 등용치 않음(훗날 위나라에 처절히 복수함).
3. 진효공과 4차에 걸친 대담으로 좌서장으로 삼음. 법을 공표하기 전에 나무를 옮기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공표한 후 나무를 옮긴 사람이 나오자 상을 줘서 법에 대한 신뢰도를 높임.
4. 태자가 법을 어기자 엄벌주의를 보여주고자 후견인과 스승을 처벌했고 그렇게 10년이 지나자 법이 자리를 잡음.
▲ 徙木立信(나무를 옮겨 신뢰를 쌓다)는 고사의 장면.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② 법치주의에 걸려든 상앙
1.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상앙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상앙은 여관으로 도망갔으나 ‘통행증이 없으면 재울 수 없다’는 법에 의해 들어가지 못해 잡혔고 거열형을 당하게 됨【나는 그가 거열형에 처해진 순간에도 그의 제도가 이미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정착된 것을 확인하고 해피하게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 1권, 94쪽】.
2. 부국강병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여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함.
▲ 거열형에 당하는 상앙.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4. 합종책으로 승승장구한 소진의 최후
① 정세
1. 진(秦)은 세력이 막강해져 동으로 진출해오는 반면, 나머지 6국은 개별적으로 대항하기에 역부족임.
2. 연횡책(連橫策)과 합종책(合縱策)
연횡책(連橫策) | 합종책(合縱策) |
장의(張儀)가 주장, 진 중심의 연맹 구축 | 소진(蘇秦)이 주장, 6국 연합으로 진에 저항 |
② 소진(蘇秦)과 합종책(合縱策)
1. 낙양 출신으로 귀곡자에게 사사 받았고 집에서 병서 탐독 후 진(秦)과 조(趙)에서 유세했으나 퇴짜 맞음.
2. 연문후(燕文候)는 합종책에 찬동했으며 소진은 6국을 돌아다니며 성사시켜 6국의 재상이 됨.
3. 조숙후(趙肅侯)에게 맹약 증서를 보이자 그를 무안군(武安君)으로 봉했고 그 증서를 진(秦)으로 보내니 15년간 쳐들어오지 못함.
4. 그 후 진(秦)은 제(齊)와 위(魏)를 속여 조(趙)를 치도록 음모를 꾸밈으로 합종책은 깨짐.
5. 연횡책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 장의와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
① 장의(張儀)와 초반의 비굴함
1. 장의는 초반에 등용되지 않았고 초(楚) 재상의 잔치에 갔다가 도둑으로 몰려 매질당하는 수모와 절친 소진(蘇秦)에게 문전박대 당하는 수모 겪음.
2. 마침내 진혜왕(秦惠王)에게 등용됨. 위와 맹약을 맺고 초회왕(楚懷王)을 만나 제(齊)와 맹약을 끊도록 하자, 초회왕이 제(齊)에 모욕스런 편지를 보내게 됨. 그러자 진(秦)-제(齊) 친교 맺음.
3. 화난 초회왕이 진을 공격했지만 크게 패했고, 오히려 진은 빼앗은 땅을 돌려주며 화친을 요구함.
② 최후의 승자가 된 장의
1. 이에 초회왕은 땅보단 장의가 화근임을 알고 장의을 보내달라 요구했지만, 조정 내 친진파(親秦派)의 활약으로 풀려났고 화친까지 맺도록 간언함.
2. 진(秦)-초(楚) 화친은 굴원(屈原)만이 반대했지만 맺어졌고, 그 외 나라와도 연횡의 맹약을 맺음.
3. 장의가 진에 와서 보고하려 하자 혜왕은 죽고 무왕이 즉위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6국은 다시 합종하였다가 결국 진이 통일하게 됨.
③ 초나라의 정세
1. 장의가 위(魏)에서 죽은 후에도 진(秦)의 정책은 그대로 유지됨.
2. 제(齊)-초(楚)는 동맹국이었으나, 진무왕이 죽고 소왕이 즉위하여 뇌물로 유혹하자 초회왕(楚懷王)은 친진(親秦) 정책을 폄.
3. 제(齊)-위(魏) 연합군이 초(楚)를 치자 진(秦)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진(秦)이 초(楚)의 태자를 인질로 지원군을 보내 전쟁이 종결됨.
4. 초(楚)의 태자가 진(秦)의 대신을 죽이고 귀국하여 진(秦)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결국 진(秦)ㆍ제(齊)ㆍ한(韓)ㆍ위(魏)의 연합공격에 대패함.
5. 진(秦)이 무관(武關)에서 회담하길 요청하자 굴원(屈原)이 반대했음에도 참석하여 초회왕은 인질로 잡혔고, 대신들은 제(齊)에 잡혀 있던 태자의 귀국을 도와 즉위시킴. 이후 초의 국력은 나날이 약해짐.
④ 애국시인 굴원(屈原)
1. 초회왕의 신임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상관대부 근상(靳尙)의 모함으로 왕과 멀어지게 됨.
2. 제(齊)와 관계가 끊어지고 진(秦)의 침입까지 받게 되자 다시 등용되나, 경양왕 즉위 후 상관대부의 참소로 추방당하게 됨.
3. 양자강과 동정호 일대를 전전하며 떠돌다가 진(秦)에 침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62세에 멱라수에서 자살함.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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