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관계설정과 한문소설의 의의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로는 이밖에 「오유란전(烏有蘭傳)」 「옥루몽(玉樓夢)」 등이 언급되고 있다. 「오유란전」【작자·창작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한문 필사본. 선비와 관장(官長)의 위선과 호색을 풍자한 작품으로, 「배비장전」과 의취가 같은 소설이다. 한양에 동갑·동학(同學)인 김·이 두 선비가 있었다. 먼저 장원하여 기백(箕伯)이 된 김생을 이생이 동행한다. 이생을 위하여 선화당(宣化堂)에서 베푼 잔치자리에서 이생은 기생을 냉안시한 처사 때문에 중인(衆人)의 빈축을 산다. 친구 기백은 기생 오유란으로 하여금 이생을 훼절시키도록 종용한다. 이생은 오유란의 함정에 빠져 유명(幽明)을 혼돈하고 온갖 추태를 자행한다. 결국은 선화당 잔치자리에서 나신(裸身)으로 대무(對舞)하다가 중인 앞에서 망신하고 만다. 이생은 곧바로 상경, 암행어사가 되어 ‘어사출두’ 봉고(封庫)하고 형구를 갖추었으나, 기백이 옛일을 사과함으로써 그들은 우정을 되찾는다.】은 국문소설인 「이춘풍전(李春風傳)」이나 「배비장전(裵裨將傳)」과 유사한 성격의 작품인데, 어찌해서 이 시기에 이처럼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의 성격이 비슷해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도 흥미로운 연구 과제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문소설, 특히 판소리계 소설【조선 후기에 등장한 판소리의 사설을 바탕으로 새롭게 서사화된 고전소설을 ‘판소리계 소설’이라고 한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판소리의 사설은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것이다. 보기를 든다면, 「춘향가」는 열녀이야기에 암행어사이야기가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심청가」는 효녀이야기에 인신공양의 설화가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이러한 판소리의 사설을 그대로 베껴 쓰거나 약간의 수식을 덧붙여 기록한 것이다.】과 해학 풍자적인 이 시기 한문단편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공통기반의 성격 같은 것도 궁금한 점이고, 또 그러한 공통기반이 어떻게 해서 상이한 두 형식으로 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구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옥루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작자, 저작연대, 「옥련몽(玉蓮夢)」과의 선후 관계 등, 서지(書誌)적 측면이 주로 논의되어 왔었는데, 그러한 측면은 그것대로 계속 논의되어 정설이 나와야 하겠지만, 그 외에도 봉건해체기 양반 이데올로기의 표출 및 그 완강한 고수(固守)로서의 측면이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는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이 작품은 현실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인간의 이상과 염원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이 시기 소설이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 및 그 존재양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보다 심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 후기의 소설에 대한 연구사를 개관하면서 그 성과와 문제점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시기 한문소설, 특히 한문단편소설은 한문으로 씌어졌다는 그 언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결코 될 수 없는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우리는 판소리계 국문소설과 더불어 이들을 통해 우리 소설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우리 소설이 아직 근대 사실주의 그 자체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로 향한 방향을 이미 확고하게 내포하고 있었음을 이들 작품은 확연히 보여준다【박지원은 까마귀의 빛깔로부터 그의 사실주의(寫實主義)론을 끌어낸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검다고 여기지만 그가 보기에 까마귀는 “홀연 젖빛 금색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공작석의 빛을 발하기도” 하며, 햇빛 속에서 자주색이나 비취색으로 바뀌는, 풍부한 빛을 머금은 존재다. 그러나 사람들의 굳은 마음은 까마귀를 무작정 검다고만 한다. 박지원은 이를 나무라며 현실의 살아 있는 까마귀 빛깔을 보라고 일갈한다. 그의 문학의 성취는 이렇게 대상을 생명체로 보는데서 출발한다. 중국 문장의 모방에 목숨 거는 이들은 이를테면 ‘까마귀란 검은빛’이란 선입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다.】.
둘째, 이들 작품은 당대의 구체적 역사현실을 대단히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점에서, 비록 한문으로 씌어졌긴 하지만,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의 국문소설과는 크게 대조된다.
셋째, 이들 작품은 당대 민중의 모습과 삶을 투시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된다. 그리하여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그 삶의 근저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우리 민중의 에너지와 미래에 대한 밝은 낙관을 엿볼 수 있다.
인용
Ⅰ. 기존 연구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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