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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 조선 후기 한문소설의 발전 본문

한문놀이터/논문

박희병 - 조선 후기 한문소설의 발전

건방진방랑자 2019. 11. 2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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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문소설의 발전

 

박희병(朴熙秉)

 

 

. 기존 연구의 방향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은 허균(許筠)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경향으로 발전한다김시습 금오신화, 우화소설 의인(擬人)소설, 화사(花史) 수성지(愁城誌) 등의 심성(心性) 가전. 대 한학자들이 즐겨 쓴 몽유록(夢遊錄)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꿈이라는 환상적인 비전을 통해 새로이 해석하고 있는 우화적 서사양식이다.. 17세기 초 허균성소부부고(惺所覆螺藁)에 실려 있는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엄처사전(嚴處士傳)」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장산인전(張山人傳)」 「장생전(蔣生傳)등은 ()’이라는 한문 서사양식의 구조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작품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가 주인공인 소설이라는 뜻으로 흔히 일사(逸士) 소설로 지칭하기도 한다. 이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당대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 중인계층, 천민들이며, 자신들이 처해 있는 현실 상황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세상을 등진 채 살고 있는 재사(才士)나 이인(異人)들이다.

 

작가 허균은 이러한 인물들의 삶의 과정을 '()'이라는 서사 양식의 틀에 맞춰 서술하고 있지만, 사실의 기록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일정한 방향으로 인물의 삶을 허구화시키고 그 성격을 재창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라는 양식에 창작 의식이 가미됨으로써 소설의 형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조선 후기라는 시대구분은 대개 17세기 중반 이후 19세기 말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전쟁을 계기로 하여, 조선조 봉건사회의 해체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급속히 진행되었던 때라는 점에서 이전 시대와 그 역사적 성격을 달리한다.

 

이 시대의 특징으로 주목되는 것은 당대에 이룩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으로 기존의 봉건적 사회관계 내부에 상당한 변화가 야기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즉 양반층 안에서 소수의 집권 사대부 계층과 다수의 몰락 사대부 계층으로의 분화가 심각하게 일어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민층 내부에서도 경제적 소유관계에 따른 활발한 계층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평민층은 그 계층적 분화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의식과 그에 의거한 사회적 실천으로 봉건질서 내부에서 자신의 힘을 꾸준히 상승시켜 갔다. 그리하여 점점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상실해 간 양반층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힘의 대립관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양반전」】.

 

평민층은 이러한 대립관계 속에서 그 상승된 힘을 바탕으로 하여, 이미 경직되고 생동성을 잃은 양반층의 문화에 대체하여 자신의 구체적 생활에 어울리는 자기의 고유한 문화 창조를 시도했다. 이 시기에 발흥한 평민적인 문화 예술 장르들은 바로 이러한 시도의 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판소리, 한글소설, 탈춤,.

 

그런데 이러한 평민층의 사회ㆍ경제ㆍ문화적 힘의 상승은 기존의 전통적인 양반층 문화의 내용과 형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그 변화를 일으켰다. 이 항목에서 우리가 살펴보려는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은 바로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에 해당된다.

 

이처럼 이 시기 한문소설의 성립과 그 성격은, 당대의 역사적 변화와 대단히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시대 한문소설로 가장 많이 연구되어 온 것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작품들이다. 박지원의 소설작품으로는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이상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 마장전(馬駔傳)」 「민옹전(閔翁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양반전(兩班傳)」 「광문자전(廣文者傳)」 「우상전(虞裳傳)이상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수록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연상각선본(烟湘閣選本)에 수록 10편이 현전하고 있다. 봉건 말기의 위유(僞儒)를 풍자한 작품인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2편은 의론(議論)이 너무 과격해 나중에 박지원 스스로 없애버린 것으로 되어 있다정신으로서 모더니티 역시 마찬가지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의 소설들이다. ‘양반전’ ‘호질’ ‘예덕선생전’ ‘열녀함양박씨전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박지원은 봉건적인 신분제를 비판하고 평등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윤리를 모색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이성과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진 보편적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했다. 한편 그의 소설은, 문체는 굉장히 높고 신분은 낮은 매력적 모순이 있다. 연암은 조선이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의식 있는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작품들에 담긴 모더니티를 생각할 때, 문화사적 측면에서 박지원은 참으로 이채로운 지식인이었다..

 

연암소설은 일찍이 김태준(金台俊)이 봉건사회에 대한 그 비판적 성격을 높이 평가한 이래 사회소설(社會小說)로서사회문제를 직접 취급하거나, 사회적 관심이 농후한 소설. 허생전은 허생이 10년 계획으로 글공부를 하다가,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7년 만에 중단하고, 장안의 갑부 변씨(卞氏)를 찾아가 1만 냥을 빌려 안성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얼마 뒤 많은 돈을 벌어 좋은 일을 한 다음 10만 냥을 변 씨에게 갚은 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하루는 어영대장 이완(李浣)이 찾아와 북벌의 묘책을 묻자, 3가지의 지혜를 제공하였으나 이완이 모두 어렵다고 하자, 이완을 쫓아낸 후 자취를 감추었다는 줄거리이다. 이 소설은 북학파(北學派)에 속하는 저자 자신의 견해인 해외통상론(海外通商論)’ ‘용차론(用車論)’ 등 작가의 실학자로서의 경륜을 볼 수 있는 작품이며, 전기(傳奇)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현실 문제를 직시한 소설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소설사의 새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크게 주목받아 왔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박지원에 대해 숱한 작가론이나 작품론이 씌어져왔지만, 여기에서는 그중 몇 가지만을 들어 그동안의 주요한 연구경향과 방법론의 갈래 및 그 문제점 등을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가원(李家源), 이재수(李在秀) 등은 연암소설의 문학적 배경과 사상적 성격을 주로 실증적 비교문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논술한 바 있다. 이들에 의해 연암 소설의 문헌적 측면은 소상히 밝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서는 작품 외적인 조건들과 작품 간의 관계가 다분히 기계적으로 파악되고 있고, 종종 작품 안의 개별적 요소가 작품 전체에서 분리되어 자의적이고 과대하게 해석되곤 하는 문제점이 엿보인다. 여기에서는 연암사상과 작품의 각각의 범주적 구조 및 그 상호관계가 특수하게 문제시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직 본격적인 연암론이나 연암소설론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이에 반해 이정탁, 이원주 등은 연암소설이 지니는 풍자적 성격에 주목하고 거기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연암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풍자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 인간생활의 결함 ·악폐(惡弊) ·불합리 ·우열(愚劣) ·허위 등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嘲笑的)인 발언.의 성격과 양태, 또 그 풍자의 대상 등이 집중적으로 규명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업적에 해당될 것이다.

 

박지원에게 풍자란, 중세적 봉건사회가 무너져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싹트기 시작한 역사적 전변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이들을 직시했던 작가 자신의 당대 사회현실에 대한 정신의 태도, 달리 말해 작가의 세계관과 직접 관계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봉건사회 해체와 대응되는 구조적 역사적 성격을 띠는 하나의 양식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까지 파악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양반전은 조선조 후기의 사회가 와해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벽촌인데, 그것은 이런 벽촌에서도 양반의 매매가 이루어진 것을 묘사함으로써 당시의 신분 질서가 심한 동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호질은 작자가 실학사상을 확립해 가던 시기의 작품으로 풍자성이 가장 짙으며 사회에서 서민을 기만하고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게 하는 에 대한 자아비판이다. 그에게 당시 리더 계층인 선비()와 관리(大夫)는 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식인의 전범은 글 읽는 선비이다. 그는 선비들이 사론(士論:천하의 공정한 말)을 펼쳐 세상에 사기(士氣:의로운 기운)가 넘칠 때 천하가 바로 선다고 보았다. ‘연암집잡저(雜著)에 실린 원사(原士)’는 조선시대의 선비론이다. 글 속의 선비지식인으로 바꾸면 오늘날의 지식인론이 된다. 그는 말한다. “깨어 있으라, 지식인이여. 지식인이 바로서야 나라가 선다.”. 연암소설의 풍자적 성격에 대한 연구는 그 기왕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각도에서 새롭게 재조명될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지원에 대한 개별논문은 아니지만, 민병수는 한문소설사를 기술하는 자리에서 종래 박지원의 소설작품으로 소개되어 온 10편을 모두 소설로 보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마장전(馬駔傳)민옹전(閔翁傳)」 「김신선전(金神仙傳)작가의 주관이 양()적으로 표현된 주관적인 문학이며 거기에 나오는 1인칭은 바로 작자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소설이 될 수 없고,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나 광문자전(廣文者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등은 시정에 흘러 다니는 이야기를 작자의 주관에 따라서 기술한 전기적인 수필에 불과하며, 우상전(虞裳傳)은 역관(譯官) 이언진의 시화(詩話)를 중심으로 한 실화이므로 이를 소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병수에 의하면 양반전」 「호질(虎叱)」 「허생전(許生傳)3편만이 소설로 인정될 뿐이다【「양반전」 「호질」 「허생등에서는 당시의 위정자ㆍ, 지식인 등 상층계층에 대한 현실적 비판과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한문 서사의 주류를 이루었던 ()’의 양식적 특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인데, ‘이라는 서사양식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소설적 형상성을 풍부하게 드러내면서 한문소설로 변모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이론적인 허점과 무리가 뒤따를 뿐 아니라 우리 고전소설사의 특수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하여 앞으로 ()소설사이의 장르적 차이에 대한 이론적 규명이나 연암소설의 서사 전개 양상에 대한 더욱 깊은 논구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한편 연암소설을 당대의 실학사상, 그중에서도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이롭게 쓰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천적인 학문의 내용이라는 뜻이다의 사상과 결부시켜 연구한 것으로 이우성의 논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민중과 집권층의 중간에서 자기에게 부여된 올바른 임무를 수행하려는 자세, 이것이 바로 박지원의 사회적 입장이었으며, 근대 양심적 인텔리의 사명감에 상통하는 것으로서, 박지원에게 있어서의 이러한 ()즉 선비로서의 자각이 종래 사대부들에게 전혀 의식되지 못했던 세계, 서민의 세계를 그의 의식세계 속에 선명히 떠오르게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민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의식세계를 확장하면서 창조적이며 진보적인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의 배후에 신흥상공업자를 위시한 서민들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그 속에서 역사의 방향이 희구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논문의 기초가 되고 있는 박지원의 사상에 대한 해석이, 그 사상구조의 전체적 파악이나 시기에 따른 사상 내용의 성격변화에 대한 고찰이 충분히 이루어진 다음에 행해진 것은 아니라는 점, 또 일단 그렇게 해석된 박지원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작품을 이해하고 있어 사상과 작품과의 관계가 다분히 정태적이며 일면적으로 파악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 등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앞으로의 박지원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 대단히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놓고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무엇보다 박지원 사상의 성격이 총체적으로 파악되고 그것과의 매개 속에서 그의 문학이 조명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그와 같은 사상까지도 그 속에 포괄되는 바인 당대의 역사상황 속에서 그의 문학이 고찰되어야 하겠다는 것, 그래야만 작품의 엄정한 객관적인 해석과 올바른 문학사적 위치정립이 비로소 기대될 수 있을 것이라는 등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 논문이 발표된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논문이 시사한 이러한 연구방법론을 심화 발전시키면서 그 문제점을 보완하는 업적은 별로 나오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물론 그간 연암소설의 역사적 성격에 주목하는 연구물은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이우성이 도달한 수준에마저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박지원에 대한 그동안의 숱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계에는 아직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보아 좋을 듯하다.

 

박지원을 단순히 그 작품 몇 편만을 놓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자칫 박지원을 왜소화시키거나 왜곡할 위험이 많다. 작품의 뒤에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그의 사상과 그 시대적 고뇌의 성격이 문제되고 그것의 문학적 매개로서 그의 작품들이 연구될 때에만 비로소 박지원의 소설작품은 생동하는 것으로서 객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며, 당대 정신의 거봉(巨峰)이며 위대한 소설가로서의 박지원의 모습이 실상대로 재구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거듭 말하지만, 박지원의 세계관의 역사적 운동과 구조를 보다 깊이 파고 들어가고, 그것과 작품과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한, 그에 대한 작가론이나 작품론은 그 어떤 것이든 자의와 피상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며, 따라서 그 본질에는 접근하지 못한 채 계속 공전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연암소설은 적막 속에서 돌연 솟아오른 것이 아니다. 그 시대에는 한문단편소설의 창작이 박지원 이외의 많은 문인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이옥(李鈺)심생전(沈生傳)·장복선전(張福先傳)·신아전(申啞傳)·상랑전(尙娘傳)·부목한전(浮穆漢傳)등에서는 시정인(市井人충효열녀(忠孝烈女이인(異人) 등을 주인공으로 하여 인간 존엄성의 긍정적인 수용과 시속의 부도덕성에 대한 고발과 그리고 현실에 대한 자각과 비극적 갈등이 반영되었다.. 연암소설은 당대의 이러한 분위기와 추세 속에서 산출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이 시기 한문소설에 대한 연구는 박지원의 작품에만 한정되어 수행되어 왔었다. 종래의 이러한 연구경향과 태도는 연암소설 자체의 문학적인 발생의 측면을 신비 속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연암소설 이외의 훌륭한 많은 한문단편소설들을 문학사에서 소외시켜 버렸다.

 

김균태는 최근 무문자 이옥1760~1815년 조선 후기 정조 때 문신으로 문체반정에 연루되면서 잘못된 글을 짓는다는 공식 낙인이 찍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의 작가론을 통해 종래의 이러한 연구태도에 반성을 가하고 있다. 비단 이옥에 대한 연구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 시대의 다른 한문소설 작가들, 보기를 들면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나 담정(潭庭) 김려(金鑢)1766(영조 42)1822(순조 22). 조선 후기의 문인·학자.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패사소품(稗史小品)체의 문장을 익혔다. 그리고 김조순(金祖淳)우초속지라는 패사소품집을 냈다. 이옥(李鈺) 등과 활발한 교유를 하면서 소품체 문장의 대표적 인물로 주목받았다. 등의 작가들에 대한 계속적인 발굴과 연구가 시급하다 하겠다.

 

 

 

 

. 초석 마련과 한문단편의 규정

 

 

한편 임형택은 개인문집과 각종 야담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한문단편들을 학계에 새로 소개함과 동시에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이 시기에 한문단편이 광범하게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원인 및 그 발생의 일반적 과정과 양태를 논급한 바 있다조선 후기의 전환기적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한문단편(漢文短篇)’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독특한 서사 양식이 등장한다. 한문단편은 그 형식이 ()’이나 민간설화와 유사하며, 야담(野談)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문단편은 시정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으로, 조선 후기 사회상의 변화, 양반계층의 몰락과 신분갈등, 남녀의 욕정, 사회 규범의 혼란과 모순 등 당대의 현실을 소박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희준(李羲準)계서야담(溪西野談), 이원명(李源命)동야휘집(東野彙輯), 그리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청구야담(靑丘野談)등에 많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임형택에 따르면,

이 시대에 이르러서 강담(講談, 이야기)을 잘함으로써 오락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강담사(講談師, 이야기꾼)가 발달하였는데강담은 18·19세기 조선 시대 강담사의 이야기를 일컫는다. 여기서 강담사란 흔히 이야기장이이야기주머니(說囊)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이야기꾼이며 협소한 의미에서 이야기꾼이라면 곧 이들을 가리키게 된다. 보통 이야기깨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서울이나 지방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형태이다. 특히 서울과 같은 도시를 배경으로 보다 전문화된 예능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직업적으로 행하였던 이야기꾼에 대해서 강담사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중시하였다. 이들은 양반다운 생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영락한 양반출신 내지 이와 상응하는 계층으로서 주로 양반대가의 주변 인물들로 대가집이나 부자집의 사랑방 같은 곳을 주된 연예무대로 하면서 시정에서 활동하였다. 이 점에서 천민 출신인 강창사(講唱師)나 시가를 주활동 무대로 한 강독사(講讀師)와 구분된다. 18·19세기 강담사들의 활동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 구연된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한문 단편이라는 장르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귀로 듣는 이야기로부터 눈으로 읽은 이야기로 전화되면서 한문단편들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곧 강담사에 의해 구연된 이야기는 한문단편의 전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강담사의 창작원리는 문인처럼 혼자 책상머리에 앉아서 문자로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민대중과 함께 구두로 엮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구두 창작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창작과정의 현장성과 관련해서다. 강담사는 시정과 사랑방을 내왕하면서 서민대중의 생활현장과 양반층의 주변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운반했던 것이다. 서민대중의 생활현실과 정감에 밀착될 수 있었던 한편으로 양반 사회 내부의 갈등과 그들의 생활분위기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판소리 문학에서처럼 서민적인 성격이 농후하면서 양반사회를 포괄하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둘째 문자언어가 아닌 생활언어를 표현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강담사의 구두창작에서는 처음부터 한문학의 정통적인 형식에 하등 구애받지 않았을 뿐더러 일상의 생활언어를 써서 창작하였으므로 아주 자유롭게 자기들의 생활 정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강담사의 강담이 이야기 내지 소설에 취미를 가졌던 지식인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다시 글로 옮겨져 한문단편이라는 문학 장르가 발생했으며,

 

이들 지식인 중에는 유명한 작자도 없지 않지만, 그 대부분은 이름 없는 작자들이며, 이들에 의해 성립된 작품들은 동패락송(東稗洛誦)」 「청구야담(靑邱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 「동야휘집(東野彙輯)등의 화집류(話集類)에 대거 수록되어 현전한다는 것,

 

한문단편은 시정(市井)의 주변이나 농촌에서 발달한 이야기들이 작품화된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역사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한문단편은 한문으로 씌어졌지만 문장의 꾸밈이 없이 소박하게 강담(講談)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우리나라식 한문(漢文)으로서 실감 있고 생동하는 글이 되었다는 것,

 

이러한 한문단편이 발달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도시의 형성과 시민 층의 대두에 있다는 것 등의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 한문단편의 발굴ㆍ소개로 국문학, 특히 조선 후기 소설문학의 영역은 훨씬 풍부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 시기의 우리 소설사는 앞으로 대폭 수정되고 보완될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과 근대를 이어주는 우리 단편소설사의 내발(內發)적 계기를 여기에서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생각까지 들게 한다.

 

임형택에 의해 이 분야에는 일단 초석이 마련되었고 대략적인 연구의 지침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는 아직 재검토와 세밀한 연구를 기다리는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이제 갓 출발한 상태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에서 우리가 우선 봉착하는 커다란 문제로는 한문단편(漢文短篇)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의 장르 규정문제일 것이다. 한문단편단편소설과 구별되는 장르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전통적 단편소설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한문단편을 역사적으로 1819세기의 문학으로서 자기 존재의 고유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의 한문소설들, 보기를 들면,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허균(許筠)의 한문소설 등도 거기에 포함시키되 1819세기에 생산되어 야담집 등에 대거 수록되어 전하는 작품들은 양식적으로 일단 전자와 구별하여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

 

한문단편민담(民譚)이나, 소화(笑話)등의 설화 장르와의 차이 및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지 않은 장르론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은 기본적으로, 개개 작품들의 성격과 각 시대 문학 현상의 역사적 성격 및 그 법칙성의 파악이 여하한 입장에 설 때보다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국문학 연구의 객관적 요구와 굵다란 하나의 흐름으로서 우리 소설사의 연면(連綿) ()이 어떤 관점에 설 때 보다 충실히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국문학 연구의 주관적 요구를 모두 고려하는 방향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장르론적 문제 이외에도 그 작자층의 성격, 각 화집의 검토를 통한 그 내적 성립과정 및 해체과정의 추적, 이전 한문소설과의 내용적 형식적 차이, 문체적 특성, 현실 반영 방식에 있어 판소리계 소설과의 비교, 우수한 작품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 문학사적 위치 등이 앞으로 보다 더 천착되어야 하거나 혹은 새로이 구명되어야 할 과제들일 것이다.

 

 

 

 

. 관계설정과 한문소설의 의의

 

 

조선 후기의 한문소설로는 이밖에 오유란전(烏有蘭傳)」 「옥루몽(玉樓夢)등이 언급되고 있다. 오유란전작자·창작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한문 필사본. 선비와 관장(官長)의 위선과 호색을 풍자한 작품으로, 배비장전과 의취가 같은 소설이다. 한양에 동갑·동학(同學)인 김·이 두 선비가 있었다. 먼저 장원하여 기백(箕伯)이 된 김생을 이생이 동행한다. 이생을 위하여 선화당(宣化堂)에서 베푼 잔치자리에서 이생은 기생을 냉안시한 처사 때문에 중인(衆人)의 빈축을 산다. 친구 기백은 기생 오유란으로 하여금 이생을 훼절시키도록 종용한다. 이생은 오유란의 함정에 빠져 유명(幽明)을 혼돈하고 온갖 추태를 자행한다. 결국은 선화당 잔치자리에서 나신(裸身)으로 대무(對舞)하다가 중인 앞에서 망신하고 만다. 이생은 곧바로 상경, 암행어사가 되어 어사출두봉고(封庫)하고 형구를 갖추었으나, 기백이 옛일을 사과함으로써 그들은 우정을 되찾는다.은 국문소설인 이춘풍전(李春風傳)이나 배비장전(裵裨將傳)과 유사한 성격의 작품인데, 어찌해서 이 시기에 이처럼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의 성격이 비슷해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도 흥미로운 연구 과제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문소설, 특히 판소리계 소설조선 후기에 등장한 판소리의 사설을 바탕으로 새롭게 서사화된 고전소설을 판소리계 소설이라고 한다.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판소리의 사설은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것이다. 보기를 든다면, 춘향가는 열녀이야기에 암행어사이야기가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심청가는 효녀이야기에 인신공양의 설화가 덧붙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이러한 판소리의 사설을 그대로 베껴 쓰거나 약간의 수식을 덧붙여 기록한 것이다.과 해학 풍자적인 이 시기 한문단편소설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공통기반의 성격 같은 것도 궁금한 점이고, 또 그러한 공통기반이 어떻게 해서 상이한 두 형식으로 발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구명되어야 할 과제이다.

 

옥루몽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작자, 저작연대, 옥련몽(玉蓮夢)과의 선후 관계 등, 서지(書誌)적 측면이 주로 논의되어 왔었는데, 그러한 측면은 그것대로 계속 논의되어 정설이 나와야 하겠지만, 그 외에도 봉건해체기 양반 이데올로기의 표출 및 그 완강한 고수(固守)로서의 측면이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는 19세기 중엽에 지어진 이 작품은 현실적인 공리주의에 입각한 인간의 이상과 염원을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은 이 시기 소설이 현실과 관계하는 방식 및 그 존재양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보다 심화시켜 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조선 후기의 소설에 대한 연구사를 개관하면서 그 성과와 문제점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시기 한문소설, 특히 한문단편소설은 한문으로 씌어졌다는 그 언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결코 될 수 없는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우리는 판소리계 국문소설과 더불어 이들을 통해 우리 소설문학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우리 소설이 아직 근대 사실주의 그 자체에 도달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로 향한 방향을 이미 확고하게 내포하고 있었음을 이들 작품은 확연히 보여준다박지원은 까마귀의 빛깔로부터 그의 사실주의(寫實主義)론을 끌어낸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검다고 여기지만 그가 보기에 까마귀는 홀연 젖빛 금색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공작석의 빛을 발하기도하며, 햇빛 속에서 자주색이나 비취색으로 바뀌는, 풍부한 빛을 머금은 존재다. 그러나 사람들의 굳은 마음은 까마귀를 무작정 검다고만 한다. 박지원은 이를 나무라며 현실의 살아 있는 까마귀 빛깔을 보라고 일갈한다. 그의 문학의 성취는 이렇게 대상을 생명체로 보는데서 출발한다. 중국 문장의 모방에 목숨 거는 이들은 이를테면 까마귀란 검은빛이란 선입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다..

 

둘째, 이들 작품은 당대의 구체적 역사현실을 대단히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 점에서, 비록 한문으로 씌어졌긴 하지만, 이상주의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의 국문소설과는 크게 대조된다.

 

셋째, 이들 작품은 당대 민중의 모습과 삶을 투시하는 데 있어 우리에게 더 없이 좋은 자료가 된다. 그리하여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그 삶의 근저에서 사라질 줄 모르는 우리 민중의 에너지와 미래에 대한 밝은 낙관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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