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초석 마련과 한문단편의 규정
한편 임형택은 개인문집과 각종 야담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한문단편들을 학계에 새로 소개함과 동시에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이 시기에 한문단편이 광범하게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원인 및 그 발생의 일반적 과정과 양태를 논급한 바 있다【조선 후기의 전환기적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한문단편(漢文短篇)’이라고 지칭되고 있는 독특한 서사 양식이 등장한다. 한문단편은 그 형식이 ‘전(傳)’이나 ‘민간설화’와 유사하며, 야담(野談)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문단편은 시정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것으로, 조선 후기 사회상의 변화, 양반계층의 몰락과 신분갈등, 남녀의 욕정, 사회 규범의 혼란과 모순 등 당대의 현실을 소박하게 그려놓고 있다. 이희준(李羲準)의 『계서야담(溪西野談)』, 이원명(李源命)의 『동야휘집(東野彙輯)』, 그리고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청구야담(靑丘野談)』 등에 많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임형택에 따르면,
⑴ 이 시대에 이르러서 강담(講談, 이야기)을 잘함으로써 오락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강담사(講談師, 이야기꾼)가 발달하였는데【강담은 18·19세기 조선 시대 강담사의 이야기를 일컫는다. 여기서 강담사란 흔히 「이야기장이」나 「이야기주머니」(說囊)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이야기꾼이며 협소한 의미에서 이야기꾼이라면 곧 이들을 가리키게 된다. 보통 이야기깨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서울이나 지방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형태이다. 특히 서울과 같은 도시를 배경으로 보다 전문화된 예능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직업적으로 행하였던 이야기꾼에 대해서 강담사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중시하였다. 이들은 양반다운 생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영락한 양반출신 내지 이와 상응하는 계층으로서 주로 양반대가의 주변 인물들로 대가집이나 부자집의 사랑방 같은 곳을 주된 연예무대로 하면서 시정에서 활동하였다. 이 점에서 천민 출신인 강창사(講唱師)나 시가를 주활동 무대로 한 강독사(講讀師)와 구분된다. 18·19세기 강담사들의 활동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에 의해 구연된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한문 단편이라는 장르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귀로 듣는 이야기로부터 눈으로 읽은 이야기로 전화되면서 한문단편들이 이루어졌던 셈이다. 곧 강담사에 의해 구연된 이야기는 한문단편의 전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강담사의 창작원리는 문인처럼 혼자 책상머리에 앉아서 문자로 써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민대중과 함께 구두로 엮어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구두 창작은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창작과정의 현장성과 관련해서다. 강담사는 시정과 사랑방을 내왕하면서 서민대중의 생활현장과 양반층의 주변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운반했던 것이다. 서민대중의 생활현실과 정감에 밀착될 수 있었던 한편으로 양반 사회 내부의 갈등과 그들의 생활분위기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판소리 문학에서처럼 서민적인 성격이 농후하면서 양반사회를 포괄하는 폭넓은 작품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둘째 문자언어가 아닌 생활언어를 표현수단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강담사의 구두창작에서는 처음부터 한문학의 정통적인 형식에 하등 구애받지 않았을 뿐더러 일상의 생활언어를 써서 창작하였으므로 아주 자유롭게 자기들의 생활 정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강담사의 강담이 이야기 내지 소설에 취미를 가졌던 지식인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전해지고 그것이 다시 글로 옮겨져 한문단편이라는 문학 장르가 발생했으며,
⑵ 이들 지식인 중에는 유명한 작자도 없지 않지만, 그 대부분은 이름 없는 작자들이며, 이들에 의해 성립된 작품들은 「동패락송(東稗洛誦)」 「청구야담(靑邱野談)」 「계서야담(溪西野談)」 「동야휘집(東野彙輯)」 등의 화집류(話集類)에 대거 수록되어 현전한다는 것,
⑶ 한문단편은 시정(市井)의 주변이나 농촌에서 발달한 이야기들이 작품화된 것이기 때문에 당대의 역사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
⑷ 따라서 한문단편은 한문으로 씌어졌지만 문장의 꾸밈이 없이 소박하게 강담(講談)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하는 우리나라식 한문(漢文)으로서 실감 있고 생동하는 글이 되었다는 것,
⑸ 이러한 한문단편이 발달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도시의 형성과 시민 층의 대두에 있다는 것 등의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 한문단편의 발굴ㆍ소개로 국문학, 특히 조선 후기 소설문학의 영역은 훨씬 풍부해질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이 시기의 우리 소설사는 앞으로 대폭 수정되고 보완될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근대 이전과 근대를 이어주는 우리 단편소설사의 내발(內發)적 계기를 여기에서 확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생각까지 들게 한다.
임형택에 의해 이 분야에는 일단 초석이 마련되었고 대략적인 연구의 지침이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분야에는 아직 재검토와 세밀한 연구를 기다리는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이제 갓 출발한 상태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 분야의 연구에서 우리가 우선 봉착하는 커다란 문제로는 「한문단편(漢文短篇)」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의 장르 규정문제일 것이다. 「한문단편」을 「단편소설」과 구별되는 장르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전통적 단편소설로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한문단편」을 역사적으로 18ㆍ19세기의 문학으로서 자기 존재의 고유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의 한문소설들, 보기를 들면, 김시습의 「금오신화(金鰲新話)」나 허균(許筠)의 한문소설 등도 거기에 포함시키되 18ㆍ19세기에 생산되어 야담집 등에 대거 수록되어 전하는 작품들은 양식적으로 일단 전자와 구별하여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 「한문단편」과 「민담(民譚)」이나, 「소화(笑話)」등의 설화 장르와의 차이 및 관계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적지 않은 장르론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은 기본적으로, 개개 작품들의 성격과 각 시대 문학 현상의 역사적 성격 및 그 법칙성의 파악이 여하한 입장에 설 때보다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국문학 연구의 객관적 요구와 굵다란 하나의 흐름으로서 우리 소설사의 연면(連綿) 성(性)이 어떤 관점에 설 때 보다 충실히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국문학 연구의 주관적 요구를 모두 고려하는 방향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장르론적 문제 이외에도 그 작자층의 성격, 각 화집의 검토를 통한 그 내적 성립과정 및 해체과정의 추적, 이전 한문소설과의 내용적 형식적 차이, 문체적 특성, 현실 반영 방식에 있어 판소리계 소설과의 비교, 우수한 작품들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 문학사적 위치 등이 앞으로 보다 더 천착되어야 하거나 혹은 새로이 구명되어야 할 과제들일 것이다.
인용
Ⅰ. 기존 연구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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