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협(女俠), 검녀(劒女)
조혜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1. 들어가기
이 논의는 고전문학의 연구 결과가 새로운 문화콘텐츠【문화콘텐츠는, 기존의 문화산업이라는 용어보다 좁은 범주의 내용물을 가리킨다. IT나 디지털기술을 이용하지 않고도 문화적 내용물을 생산하고 서비스했던 산업을 문화산업이라고 한다면, 문화콘텐츠는 방송, 영화, 게임, 애니메이션, 음반, 캐릭터, 전자책 등 영상미디어나 디지털미디어와 같은 뉴미디어를 이용하여 저장, 유통되는 문화예술의 내용물들을 일컫는다.】 창작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 즉 문화콘텐츠 창작 원천 소스(sauce)로서의 연구가 되기를 염두에 두면서 진행된 작업으로, 본고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조선후기 한문단편 「검녀(劒女)」)에 등장하는 여성 검객이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검객으로 강호와 시정을 누비다니, 조선시대에 대한 상식에 비추어 볼 때 혹은 조선시대 문학에 나타난 여성인물상을 염두에 둘 때, 이 연구의 대상은 예외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화콘텐츠에서 이런 예외성은 오히려 신선함, 호기심 등과 연결되면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인물을 접했을 때 비슷한 예외성을 전제로 한 예로 ‘다모(茶母)’를 들 수 있다. 다모라는 캐릭터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설정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조선시대 기록 가운데에서 ‘다모’와 관련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는 데 있다. 즉 다모라는 명칭 및 다모가 수행했던 일들은 실제로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맡았던 일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일례(一例)로, 송지양(宋持養, 1782∼?)은 「다모전」에서 여성 피의자들을 수색, 검거하는 일을 맡은 다모의 이야기를 입전해놓았다. 이 ‘다모(茶母)’는 1970년대 「선데이서울」에 연재되었던 방학기의 만화 「다모 남순이」를 시작으로 하여, MBC 드라마 「다모」 및 이명세 감독의 영화 「형사 듀얼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다양한 설정으로 재생산되었다.】.
고전문학의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새로운 문화콘텐츠의 등장인물로 적합한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기존의 콘텐츠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면서 주제 면에서 보편적인 가치와 함께 현대적인 가치로 재해석될 만한 인물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모색의 결과, 기존에 덜 알려진 예외적인 인물, 아웃사이더와 같은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탐구가 더 필요하리라는 판단 하에 논의 대상으로 여성 검객을 선택하였다.
검녀는 여성들의 공적 활동을 철저하게 규제하고 순종적인 면모만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등장한 여성 협객이다. 따라서 시대와 인물이 만들어 내는 대조의 효과가 극명하다. 새로운 문화콘텐츠의 캐릭터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고전문학의 인물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기존 논의만 보더라도 인물 연구는 그 성과가 많이 축적되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인물 연구는 인물에 대한 이념적 관심 및 평가가 연구의 중심에 놓여 있거나 혹은 인물을 유형별로 범주화하여 설명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성과들이 많다. 곧 개별 인물들의 서사(敍事)나 시각적인 요소 등은 논의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았다.
이 같은 연구 결과로는 해당 인물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한, 인상적인 캐릭터를 구상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왜냐면 오늘날의 문화콘텐츠는 대개 멀티미디어 기술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화콘텐츠의 캐릭터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시각적인 구현이 가능해야 하는데 기존 논의들은 인물의 시각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술적인 연구의 축적 및 이론의 발전을 위한 인물 연구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문화에서 고전문학이 살아있는 텍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고전문학의 인물 연구 방법 역시 변화할 필요가 있다. 현재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은 우리나라 고전에 관심은 가지고 있으나, 원천 소스의 한계가 창작 결과물의 한계로 이어지는 결과들을 보여준다.
보기를 들어, 애니메이션 「신 암행어사」는 「춘향전」, 「어사 박문수」 등 우리나라의 고전문학 작품들을 끌어들였지만 고전 인물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으로 캐릭터 재해석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고전문학 또는 고전문학 연구자들이 오늘날의 문화콘텐츠와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 고전연구가 문화콘텐츠를 염두에 둔다고 해서 그 연구의 의미가 희석되는 것이 아니다. 고전 연구자의 연구가 오늘날의 문화 속에서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기능적인 요소들만 지적하고 제시해 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연구자의 해석 및 관점까지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들까지도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 때, 고전 작품을 토대로 한 새로운 창작도 깊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이 같은 입장을 토대로 하면서 「검녀」를 분석하고, 이 작품 및 검녀 캐릭터에 대한 연구자의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2. ‘무(武)’와 ‘협(俠)’ 그리고 여성 인물들
검녀가 오늘날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서는 이유는 그녀가 무공에 뛰어난 조선시대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협(俠)에 대한 정의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사마천이 『사기』 「유협열전」에서 서술한 말이다. 그는 유협(游俠)에 대해 정의하여, ‘비록 그 행위가 정의에 합치되지는 않지만 그 말은 반드시 신의가 있고 또 행동은 과감하여 이미 허락한 일에는 성(誠)을 다한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의 괴로움으로 달려가 생사존망의 사이를 넘나들면서도 그 재능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니,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박희병, 「조선후기 민간의 유협 숭상과 유협전의 성립」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길사, 1992, 277면.】고 하였다.
박지원도 협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는데 그는 ‘힘으로 남을 구하는 것을 협(俠)이라 하고, 재물로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고(顧)라고 한다. 顧는 명사(名士)가 되고 俠은 전(傳)으로 남는다. 협과 고를 겸하는 것을 의(義)라 한다.’【김영호, 『조선의 협객 백동수, 푸른역사』2002, 64면.】고 하였다.
협객(俠客) 중 무술이 뛰어난 인물이 무협(武俠)인데, 협에 대한 위의 정의를 참고해 볼 때, ‘무’는 일종의 수단이고, ‘협’은 목적이 된다. 즉 무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협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량셔우쭝, 김영수ㆍ안동준(역),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 김영사, 2004, 204면.】.
검녀는 여성이면서 검술에 능했으며, 동시에 주인과의 의리 및 자신의 뜻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협」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여협 이미지의 시원(始原)은 중국의 사서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등장하는 월녀(越女)에서 찾을 수 있다. 흰 원숭이와 한판 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둔 그녀는 신묘한 검술로 칭찬을 받았다【김용 월녀검(越女劍).】.
그런데 검술에 능한 여협은, 월녀만이 아니었다. 중국 협의류(俠義類) 소설【당대(唐代) 소설은 내용과 주제 면에서 크게 신괴(神怪), 애정(愛情), 협의(俠義)로 나누어진다. 정민영, 「당대 협의소설속의 여협」 중국어문학지 12호, 2002, 201면.】은 초기부터 손발을 주로 쓰는 무협(武俠)에는 남성이, 검술에 능한 검협(劍俠)에는 여성으로 편중되어 있다. 중국 초기 협의류 소설에서 검협을 대표하는 인물은 당나라 배형(裵鉶)이 쓴 전기소설 「섭은낭(聶隱娘)」에 등장하는 여성 섭은낭과 공공아(空空兒) 같은 여협이다. 여협이 검협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인 신체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무술과 관련된 서사가 낭만적으로 전개될 가능성 역시 높아진다. 조선의 「검녀」에서도 그녀의 무공 시범 장면은 매우 낭만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검녀」가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에 유협전(遊俠傳)【사나이다운 기질과 신의가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대체로 협객(俠客)이나 검객(劍客) 등이 이 부류에 속함】의 기록이 활발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조선 후기 유협전(遊俠傳)과 「검녀」는 차별화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무(武)’에 대한 관심이다.
조선 후기 유협전들을 보면, 대개 협기(俠氣)나 신의 또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무’가 강조되는 것은 미미한 편이다. 즉 조선 후기 유협전 서술자들의 관심은 ‘무’ 자체보다는 ‘협’에 놓여 있어서 등장인물들 중 무예를 갖춘 이들은 드물었다.
실제 인물인 백동수(白東脩: 1743~1816), 김체건(金體乾), 김택광(金光澤)과 같은 이들은 무를 겸비한 협객들인데, 이들의 무예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화되지 않은 반면, 기타 무력을 갖춘 인물들은 무뢰배로 그려지거나 혹은 ‘이충백’처럼 진정한 협이라고 보기 어려운 인물이 협의 범주로 입전(立傳)되었다. 이 예로 미루어 볼 때, 조선 후기 유협전의 성행은 ‘무협’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협’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유협전의 이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검녀는 무예를 갖춘 협객이라는 점에서 인물의 개성이 돋보인다.
그런데 검녀 외에는 고전문학의 여성 인물 가운데 무협적 요소를 지닌 인물을 찾아볼 수 없는가? 무예를 지닌 여성인물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장군형 소설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고소설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장군들이다. 「홍계월전」의 홍계월(洪桂月)이나 「옥루몽」의 강남홍(江南紅傳) 같은 인물들은 장군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들이다. 그런데 여장군 유형에 속하는 인물들은 체제 순응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협객과는 그 인물 성격이 다르다.
「박씨전」의 계화는 무예를 갖춘 여종인데 그녀 역시 여전히 체제에 순응하는 존재이다. 또 「다모전(茶母傳)」의 다모와 같은 인물은 협기가 있는 여성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서사에서는 ‘무’의 요소가 약하다.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협’자를 쓴 이옥(李鈺)의 「협창기문(俠娼奇聞)」에 등장하는 기생 역시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협기(俠氣)만 있을 뿐 ‘무(武)’의 요소는 전무하다. 이에 비해 검녀는 완벽하게 ‘무협’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인물이다.
3. 「검녀」의 여성 캐릭터 분석
1) 「검녀」 작품 소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종이다. 그녀는 주인댁 소저와 함께 검술을 익혀 주인댁의 원수를 갚은 다음,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한 양반의 소실이 되기를 자청했으나 그가 큰 인물이 아님을 깨닫고는 따끔하게 충고를 남기고 도로 남장을 하고는 떠나버린다는 내용이다.
주인집 소저와 동갑인 그녀는 소저의 소꿉놀이 시중을 들며 같이 자란 사이인데, 소저가 아홉 살 때 주인집이 권세가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고 오로지 소저와 유모 그리고 그녀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을 할 수 있었다.
10살이 되자 소저는 그녀와 상의해서 남장을 하고 검객을 찾아 길을 떠났고 2년 후 비로소 검객을 만나 검술을 전수받았으며 5년이 되자 마침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무협영화에서나 가능할 정도의 무술을 수련한 후 그들은 유명한 도회지를 다니며 자신들의 검술을 보여주고 몇 천 냥에 이르는 돈을 벌어 마침내 보검 넉 자루를 손에 넣게 된다. 그리고는 묘기를 자랑하러 온 사람들인 척하며 원수의 집을 찾아가는데 ‘달빛을 타고 칼을 휘둘러 칼날이 이르는 곳에 떨어진 머리가 금방 수십이 되었고[乘月舞之, 飛劍所割, 頃刻數十頭]’ ‘원수의 집 안팎의 식구 모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讐家內外皆已赫然血斃矣]’졌으며 그리고서 자신들은 ‘날고 춤추며 돌아왔다[飛舞回來]’고 한다.
그 후 소저는 목욕하고 여복(女服)으로 갈아입은 후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복수한 내용을 선산(先山)에 고하고 자결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여종에게 당부하여 ‘나는 남자가 아니니 살아남더라도 가문을 이을 수 없고, 남장으로 8년간 천 리를 횡행했으니 비록 남에게 몸을 더럽힌 바 없지만 어찌 처녀의 도리이겠느냐[吾非吾親之男子, 雖生存於世, 終非嗣續之重. 而男裝八歲, 方行千里, 縱不汚身於人, 寧爲處子之道乎]?’라고 하고서, 다시 중매해 줄 이가 없어 혼인도 불가하니 자신은 여기서 자결할 터인데 자신이 죽은 후 보검 두 자루를 팔아 장례를 지내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한다.
그리고는 ‘너는 내 처지와는 다르니 천하의 기사(奇士)를 택해 그의 처나 첩이 되라[審擇奇士, 爲之妻妾也]’고 하면서 ‘너 역시 기이한 포부와 걸출한 기상이 있는데 어찌 평범한 남자에게 머리를 숙이고 고분고분 살겠느냐[汝亦有奇志傑氣, 豈其甘心低眉於凡子者乎]?’는 말을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칼날에 엎드려 죽었다.
여종은 소저의 말대로 장례를 지내 준 후 남장으로 3년을 더 떠돌다가 고명한 선비로 삼남에 이름이 높았던 소응천(蘇凝天)을 택해 소실로서 몇 년 동안이나 동거를 했다. 위 내용은 어느 날 그녀가 독한 술과 좋은 안주를 갖추어서는 밝은 달밤에 소응천에게 고백한 자신의 과거사였다. 그녀가 그런 고백을 하게 된 동기는 살아보니 그가 천하의 기사(奇士)가 아닌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런 줄 알면서도 억지로 모신다면, 이는 나 자신의 소망을 저버리는 것이요, 아울러 소저의 당부를 어기는 것[賤身旣知座下之非奇士, 而要終身仰望, 則是負宿心, 而兼負娘子之命也]’이라고 하고서, 내일 새벽에 떠나 먼 바다, 조용한 산에서 노닐겠다. 남장으로 가뿐히 갈아입고 떠날 것이니 ‘어찌 다시 여자로서 음식을 장만하고 바느질하는 일에 얽매어 지내겠는가[寧復爲女子, 低眉斂手於飮食縫紉之事乎]?’라고 한다. 그리고 작별의 예로 비장(秘藏)했던 검술을 선보이기 위해 그에게 독한 술 10여 잔을 권하는데 소응천의 정신이 굳세지 못하므로 술기운에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의 매서운 칼바람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고는 남장을 한 후 연화검 한 쌍을 꺼내 자신의 화려한 칼솜씨를 한바탕 과시했다.
소응천은 ‘처음에는 긴장하고 앉았다가 중간에는 벌벌 떨더니 마침내 쓰러져서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凝天大驚, 而赧然嘿然, 不能開一語, 只受所擎之杯, 旣滿平時之量, 止之].’ 그녀는 칼을 도로 집어넣고 옷매무새를 만지더니 술을 데워 한 잔 마시고 기뻐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남장을 한 채 떠나갔으며 그 후로는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안석경(安錫儆 1718~1774)이 쓴 「삽교만록(霅橋漫錄)」에 제목도 없이 수록되어 있다. 그가 삽교로 들어간 것이 최소한 50세(1768) 이전의 일일 것으로 추정되니, 「삽교만록」의 저술은 아마 1770년부터 1773년 사이의 일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실제 인물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 한 명은 안석경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준 ‘단옹(丹翁)’이라는 인물이고, 다른 한 인물은 작품 속에서 검녀를 첩으로 삼았던 ‘소응천(蘇凝天)’이라는 인물이다.
단옹은 안석경의 친구였던 민백순(閔百順 1711~1772)을 가리키는데, 민백순은 자가 순지(順之), 호가 경암(警菴)ㆍ단실자(丹室子) 등이다. 그는 노론의 영수 민진원(閔鎭遠)의 손자로서, 후에 벼슬이 승정원 좌승지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안석경과는 선대부터 교유가 있어 유달리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 작품이 ‘단옹이 호남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다.’로 시작하는 것을 볼 때, 이는 민백순이 아버지의 귀양지였던 나주에 따라갔을 때 들었을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소응천(蘇凝天: 1704~1760)의 자는 일혼(一渾), 호는 춘암(春庵)으로 그는 파당(派黨)으로 인한 혼란한 현실을 떠나 두류산으로 은거를 한 후, 평생 산림 속에서 은거하며 이곳저곳을 유람하다가 말년에 전주로 나와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당시 호남에서는 그가 남명 조식 이후의 고결한 처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고, 따라서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집인 『춘암유고(春庵遺稿)』 권7 「처사소공행장(處士蘇公行狀)」에 의하면, 한 번은 ‘피세입산(避世入山)’이 죄목이 되어, 또 한 번은 무고(誣告)를 받아 그를 따르던 몇몇 사람과 함께 끌려갔던 일이 있다.
그런데 「검녀」를 보면 ‘지금부터라도 산림에 은거하지 마시고 그저 적당하고 평범하게 전주와 같은 큰 도회지에 살면서 아전들의 자제나 가르치며 살면 세상의 화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願自今無居深山, 而隤然闒然, 處全州大都會, 敎授吏胥子弟, 以足衣食而已, 無他希覬, 則可免世禍矣].’는 대목이 있어 소응천의 실제 삶과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안석경과 민백순의 친밀함, 소응천이라는 인물의 실재 삶과 서사의 일치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당대 현실 속에서 충분히 개연성 있는 서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2) 「검녀」의 서사 분석과 캐릭터의 특징
고전문학이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제작되려면 고전의 서사(敍事) 또한 오늘날 서사방식으로 바꾸어 서술할 필요가 있다.
고전은 고전의 문법, 즉 당대 장르의 문법으로 서술되는데 이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해당 작품의 서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사에 대한 이해는 서사의 주인공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품은 두 여성 검객의 복수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주인집을 멸망시킨 원수를 갚기 위해 소저와 뜻을 같이 하고 오랜 세월을 기다려 그야말로 깔끔하게【‘달빛을 타고 칼을 휘둘러 칼날이 이르는 곳에 떨어진 머리가 금방 수십이 되었습니다. 원수의 집 안팎의 식구가 모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진 것입니다. 그러고서 우리는 날고 춤추며 돌아왔지요.’ 이 대목은 빠른 칼놀림과 경공에 능한 그녀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복수를 마무리하는 이야기가 바로 「검녀」인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그 장면을 시각화해 보면 그녀들의 검술은 스펙터클하면서도 화려한【「검녀」 외에도 조선시대의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 중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혹은 자신의 정절을 모해한 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인을 시도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의 복수 장면은 매우 단순하게 처리되어 싱겁거나 혹은 잔혹하게 그려져서 결코 「검녀」의 복수 장면처럼 화려하고도 낭만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검녀」의 복수 장면이 이렇게 그려지는 것은 비기(秘技)에 가까운 그녀들의 검술에서 기인한다.】 영상으로 펼치기에 충분한 장면이기도 하다. 편역자들이 제목을 ‘칼 쓰는 여자[劍女]’라고 붙였듯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강호의 검객과 복수라는 무협의 코드가 들어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두 여성이 이렇게 복수를 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검객을 찾아 나서고 그 밑에서 제자가 되어 검술을 전수받는 수련의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이 작품에서는 이 수련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비로소 검객을 만나 칼 쓰는 방법을 익혔고, 5년 만에 마침내 공중을 날아 왕래할 수 있었다[經二年始得之, 學舞劍, 五年始能飛空往來].’고 하는 대목은, 그녀들이 스승을 만나 수련을 하는 사건들로 채워질 수 있다. 즉 이 작품은 수련의 서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검사(劍師)를 만나 검술을 익히는 이야기는 신광수의 「검승전(劍僧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백동수의 경우도, 검선(劍仙)이라 불렸던 김광택을 찾아가 김광택 및 김체건의 검법을 전수받으려 했다.
또 이 작품은 탐색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에서의 탐색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여성이 검술의 스승을 찾는 과정, 원수를 찾는 과정 및 검녀가 모실 만한 남성을 찾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탐색은 두 여성 인물이 검무를 추며 여러 집을 방문하면서 원수의 집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 조선후기에 검무(劍舞)를 췄던 여성은 기예를 갖춘 관기(官妓)【『의유당관북유람일기』중 「북산루」를 보면 관군 복장을 한 관기들이 검무를 춰서 의유당의 흥취를 돋웠다는 대목이 나온다.】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계서야담(溪西野談)』 「유생자낙하인(柳生者洛下人)」과 같은 작품을 보면 어렸을 때 한 남자와 결혼해서 같이 살자고 약속했던 한 여성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하고 칼춤을 추면서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친구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검녀」의 두 여성이 사용한 탐색 방법과 같다.
두 여성이 비록 주인댁 아가씨와 그 몸종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어도 20대 여성이고, 쌍검을 쓰며, 남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공통점이 있다. 이때 쌍검은 ‘연화검’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으므로 연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을 수도 있다【쌍검을 쓰는 여성 인물 중 대표적인 이로는「옥루몽」의 강남홍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검술 장면 역시 매우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녀들의 칼춤 장면은 신윤복의 「쌍검대무」를 참고해서 구성할 수도 있다. 또 작품에 묘사되어 있는 화려한 무공 장면 역시 시각적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응천 앞에서 선보인 마지막 검술 시범 장면에서 검녀는 말술을 들이켜 홍조 띤 붉은 뺨에 푸른 털로 만든 건을 두르고 붉은 비단 상의 위에 수놓은 황색 띠를 둘렀으며 밑에는 흰 비단바지에 무늬 있는 무소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고 마치 특수효과를 연상시키는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한 쌍의 연화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저고리와 치마를 다 벗고, 홑겹으로 갈아입고서는, 두 번 절을 하고 일어나는데 사뿐히 나는 것이 물 찬 제비 같더니, 별안간 공중으로 칼이 날자 몸을 솟구쳐 그것을 옆구리에 끼었다. 처음에는 사방으로 흩어져 꽃잎이 떨어지고, 얼음이 부서지고, 중간에는 둥글게 모여서 눈이 녹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끝에는 훨훨 날아올라서 고니와 학처럼 나는데, 이미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또한 칼을 볼 수 있으랴! 다만 한 가닥 하얀빛이 동쪽을 치고, 서쪽에 부딪치며, 남쪽에서 번뜩이고, 북쪽에서 번뜩하여, 휙휙 바람이 나고, 싸늘한 빛이 하늘에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외마디 소리를 부르짖으니 휙 하고 뜰에 있던 나무가 베이고는, 칼을 던지고 사람이 우뚝 섰다. 나머지 빛과 못 다한 기운이 싸늘하게 사람을 감고 돌았다.
3) 「검녀」의 주체성
검녀가 ‘삼남의 고명한 선비’의 소실로 얌전하게 살았으면 그녀 역시 조선의 질서 안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과감하게 그 남자를 떠나 남장을 하고 다시 ‘절해공산(絶海空山)’ 즉 강호(江湖)로 돌아가 버렸다. 무공을 즐겨했든 아니든 그녀가 절해공산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높은 수준의 검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조선 아녀자의 삶 대신 검녀, 여협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여종이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젖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으로 떠난 것과는 달리 양반 여성은 복수 후 자결을 선택함으로써 다시 조선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다. 남장을 하고 검객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일탈적이지만 그녀가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거기까지는 조선이라는 체제에서도 기려 주었던 이야기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인을 한 경우는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효를 실천한 것이라고 해서 기림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가 아니라 남편의 원수를 갚은 경우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보기를 들면, 임윤지당의 「최홍이녀전(崔洪二女傳)」 역시 억울하게 죽은 남편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부인과 딸을 절(節)이라는 덕목으로 기리고 있다.
그러므로 멸문지화를 당한 후 부모의 원수를 갚은 그녀의 행동은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복수 후 양반의 신분에 맞게 자결을 선택한 것 역시 신분 질서를 공고히 지켰다는 점에서 조선의 지배 체제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종의 일화이다. 야담 중에는 여성 인물이 자신의 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연치 않게 마주친 남성과 동침하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이런 경우는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그 남성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검녀는, 어떤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우러러 볼 만한’ 남성을 택해, 누군가를 찾아가 스스로를 천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이 같은 표현은 검녀만이 아니라 양반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주인이든 여종이든 ‘앙망(仰望)’이나 ‘택(擇)’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우러러 볼만할 만한 인물이 아닌 경우에는 선택하지 않겠다.’는 그녀들의 의지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런 단어의 사용을 통해 여성인물의 의지가 강조되는 효과를 얻는다. 그런데 이 작품 역시 조선 시대의 텍스트이므로 검녀 역시 ‘시건즐(侍巾櫛)’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통틀어 이 표현은 소응천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향해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했던 한 장면에서만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남녀의 만남에서 여성 인물이 사용할 단어로 적당한 것은 ‘택(擇)’보다는 ‘종(從)’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남편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앙망할 만한, 즉 따를 만한 대상’을 선택해 남편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더구나 이를 위해 자신을 천거하는데, 조선 시대의 규범과 관습을 생각해 볼 때, 여성이 남성에게 스스로를 천거하는 것은 과감하고도 파격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다【한문 단편집 중에는 간혹 여성이 남성을 선택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은 대개 남녀 관계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다른 필요에 의해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으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 맺기의 양상이 다른 예, 즉 그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다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그 남성과의 일대일 관계 자체가 관계 맺기의 목적인 경우로 그려지는 경우로는 아마 황진이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기사(奇士)’일 것을 기대해 자천했던 그 남성은 막상 살아보니 ‘마음을 닦고 몸을 지키는 방법이나 세상을 다스려 후세에 모범을 보이는 높은 도’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에 그녀는 “알맹이가 없는 이름은 태평 시에도 화를 면하기 어려운데, 난세를 맞는다면 어떻겠는가? 선생이 이제 근신한들 안전하게 일생을 마치기도 쉽지 않으리다. 지금부터라도 산에 은거하지 마시고 그저 적당하고 평범하게, 전주와 같은 큰 도회지에 살면서 이속들의 자제나 가르치며 의식의 충족이나 도모하고 달리 희망을 안 가지면 세상의 화를 면할 수 있을 것[夫得過實之名者, 雖在平世, 亦難自免, 況於亂世哉! 座下愼之, 其得全終, 必不易矣. 願自今無居深山, 而隤然闒然, 處全州大都會, 敎授吏胥子弟, 以足衣食而已, 無他希覬, 則可免世禍矣]”이라고 충고한 후 자신은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소응천에게는 이 말만으로도 놀라울 뿐인데, 그녀는 화려하게 남장을 하더니 연화검 두 자루를 가지고 검술을 선보인 것이다.
고수의 반열에 오른 무협(武俠)으로서의 기상, 이는 조선 시대의 평범한 여성이 지닐 기상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 기상이 모르는 남성에게 스스로를 천거할 수 있었던 힘이었을 것이며, 동시에 결연히 그에게서 떠날 수 있는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치 유협(遊俠)이 다시 강호로 나가듯 그녀는 ‘절해공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절해공산, 그곳은 조선이 그 통치 이데올로기로 규율할 수 없는 공간으로, 조선이라는 체제 밖에 놓인 세상이다. 그녀는 결국 조선의 체제 바깥으로 유유하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녀의 주체성이 돋보인다. 그녀는 주체적으로 ‘남성’을 그리고 ‘강호’를 선택했다. 처음에는 여주인에 대한 신의로 인해 복수에 동참하였으나 복수를 이룬 후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기준을 놓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기존 논의에서는 이 작품을 ‘인권’ 획득의 문제, 혹은 ‘민중의 움직임’으로 읽었으나 검녀는 인간 혹은 민중으로 치환되기 어렵다. 그것은, 검녀의 행동은 남성을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시대의 여성 현실과 무관하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을 보면 검녀의 행동이 결코 계층이나 계급에 대한 의식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작품을 보면 검녀는 주인과 여종이라는 신분 차이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문제 제기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다변화되고 다층(多層)화된 사회에서 검녀 캐릭터를 민중 코드로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미묘한 현실과 문제의 지점들을 둔탁하게 뭉뚱그려 놓을 것이다【하층민 해석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영화가 「왕의 남자」이다. 「왕의 남자」 시나리오의 신선함은 남사당패 광대를 더 이상 민중의 대변자로만 해석하지 않는 그 작품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이 작품은 그동안 민중의 대변자로 광대를 읽어내던 관점에서 벗어나 광대를 사적인 문제에 얽힌 개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검녀의 주체성은 조선시대 하층 여성이 자기 성의 주체로 행동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성과 섹슈얼리티의 문제로 접근해 본다면, 당대에는 인정되지 않았던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결정권, 성적(性的) 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했던 조선의 하층 여성 검녀의 주체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만한 것이다.
4. 체제 밖의 삶을 선택한 조선시대 여성 인물
검녀가 향한 ‘절해공산(絶海空山)’은 ‘강호(江湖)’의 다른 이름이며, 규범 밖에 위치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강호는 ‘방외(方外)’와 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본고에서 검녀가 선택한 강호를 방외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은 여성 중에서도 방외인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갖는 체제저항적인 힘, 체제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그녀의 면모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녀가 기존의 질서에 포섭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세운 데서 비롯한 것이었다. 남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또 버리기도 했던 검녀는 자기 성의 주체로서 행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태도는 조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윤리와 부합되지 않는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성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불온한 일이었다.
검녀가 조선시대의 여성으로서는 드문 삶의 궤적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조선 사회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방향으로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성의 주체로서의 면모와 관련하여 조선 여성 중에 검녀와 비견할 인물을 찾는다면 황진이(黃眞伊))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조선시대에도 지인지감에 의해 남성을 선택하는 여성들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지인지감을 통해 남성을 선택하는 여성들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조선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여성의 미덕으로 귀결되고 기려지면서 조선의 질서 안으로 귀속된다. 이에 비해 검녀와 황진이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관리하는 조선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남성 인물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검녀와 황진이의 이런 면모는 이 두 인물이 조선시대를 넘어서서 오늘날까지 여전히 매력적인 인물로 다가설 수 있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황진이와 검녀는 둘 다 하층신분이면서 자기 성의 주체였다. 이사종과의 6년 동거나 이생과의 금강산 유람 등을 볼 때, 황진이 역시 당대의 제도를 넘어선 여성이었다.
그러나 「검녀」의 창작 시기인 18세기 말에 비해 황진이가 살았던 16세기는 여성에 대한 규율이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작동했던 시기이다. 또한 황진이에 관한 조선 시대 기록은, ‘황진이의 모친이 받아 마신 물이 술로 변했다’ ‘황진이를 낳을 때 기이한 향기가 (사흘이나) 방을 가득 채웠다’, ‘모친이 물을 마시고 감정이 통해 황진이를 임신했다’는 식으로 신화화되거나 전설화된 측면들이 있다. 조선의 담론에 의해 그녀는 신선이 되고 말았다. 황진이를 담론화 하는 조선 시대의 서술 방식은 그녀를 섹슈얼리티의 대상으로 부각시키는 반면, 그녀를 저항적인 에너지를 가진 주체로 읽는 것은 막고 있다.
「검녀」의 서사가 그녀의 협기를 부각시키는 방면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에 들어 활발해진 협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유협을 숭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체제에서 스스로 이탈하고, 자기 윤리를 가진 여성 협객인 검녀가 나타난 것이다.
검녀는 조선시대에 ‘방내’가 아닌 ‘방외’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여성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시대 여성상의 범주를 확대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체제 밖의 삶을 선택한 조선시대 여성 인물의 서사, 검녀의 인물 형상은 오늘날 여성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문제적이며, 검녀를 이런 방식으로 재해석해 내는 것은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이 검녀 캐릭터를 해석하고 창작해 나가는 데. 깊이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5. 끝맺음
순종(順從)과 인고(忍苦)를 체화한 여성 이미지든 혹은 균열을 꿈꾸며 자의식을 벼렸던 여성 이미지든 전통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방내(方內)’에서 살아갔던 다수 여성들의 이미지들이다. 조선 시대 여성과 방외 및 협을 연관 지어 보는 이 논의는 조선 시대에는 그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들은 전혀 없었을까? 하는 궁금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를 살아갔던 조선 시대 여성들은 제도가 규율하는 대로만 살았던 것일까? 조선 사회의 질서를 내면화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인 원형으로 그녀들 내부에 자리 잡아버린 것일까? 어우동이나 감동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제도가 금했던 사이를 틈타 자기들끼리 살짝살짝 그 금기를 넘나들었던 사례들이 없지는 않았다.
규방 여성들은 규제 속에서도 나들이하고 놀이하고 구경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 부를 기회를 엿보며 절에서 숙박과 잡담을 즐기기도 했다【정지영, 「규방 여성의 외출과 놀이 : 규제와 위반, 그 틈새」 한국의 규방문화, 박이정, 2005 참고. 이 책의 논의는 조선 전기 사례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욕망은 물론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경우는 아니었으나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극단적인 각오를 해야 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금지의 틈새를 비틀거나 비집고 자기네들끼리 노는 일을 열심히 도모했던 여성들의 사례는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삶의 일부분으로 실감 있게 다가온다.
조선 시대 여협 검녀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았던 여성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당시의 제도를 비껴서 방외의 삶을 선택했던 여성들이다. 조선 후기 사회는 규제를 위반하려는 여성들의 욕망을 더욱 철저히 규제했지만, 또 한문단편의 편찬자들은 그녀들의 선택을 선비의 선택이나 그들의 가치문제로 다시 환원시키고 있지만, 그러나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 의미의 그물망 사이로 넘쳐 나면서 오늘날 다시 그 존재를 환기시키고 있다.
검녀 이야기는 조선 사회의 이데올로기로 포획되지 않은 혹은 길들여지지 않은 조선 시대 여성의 예, 주체적인 여성 아웃사이더의 예를 보여준다. 또 더 나아가 검녀와 같은 여성 검객 캐릭터는 무협의 캐릭터로, 혹은 재해석을 거쳐 여전사 이미지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변형 및 복제(재현) 가능성이 풍부해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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