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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본문

책/한문(漢文)

‘주영염수재’라는 집의 기문 -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5.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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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중국지식인들 밀실로 들어가다

 

그런데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이 보여주는 이런 취향의 문화적 진원지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명말明末에 이런 취향이 대대적으로 성행했으니, 당시 중국 사대부들은 정원을 그럴 듯하게 조성하여 그 속에 누각이나 서재를 지어 놓고 거기다 각종 고기古器나 고서화를 비치하여 수시로 감상했으며, 고급 향을 피우고 좋은 차를 마시면서 고상하고 운치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리나 세속을 초월한 깨끗하고 담박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이런 태도나 취향은 한편으로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감수성을 확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으로서의 사대부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다시 말해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고 생각해야 하는 사대부 본연의 책무와 덕목을 방기하거나 소홀히 하게 만든 측면도 없지 않다.

 

그 결과 명말의 사대부들은 대체로 개인적인 신변잡사에 매몰되면서 퇴영적인 의식이나 공허한 문예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내면적 세계와 외면적 정치의식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균형을 상실해 버리고, 내면으로 달아나 버리고(혹은 침잠해 버리고) 만 것이다. 요컨대 광장을 버리고 밀실속으로 들어가 버린 셈이다.

 

 

 

환관의 발호, 양명학의 발생, 물질적 기반의 충족

 

명말의 중국 사대부들이 이런 성향을 보이게 된 이유는 그리 단순치 않지만, 크게 보아 다음의 두 가지 요인이 특히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이 시기 환관의 발호로 인해 사대부들이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양명학 등의 영향으로 인간 본연의 감정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조가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취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물질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은 어떻게 이런 물적 기반을 갖출 수 있었을까? 물론 조선 사대부 전체가 아니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근기近畿 지역의 일부 사대부들에 한정되는 현상이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이런 취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물적 기반이 어떻게 확보될 수 있었는지는 역시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17세기 후반 이래 역관배譯官輩를 통한 대청對淸 무역을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한다. 대청 무역을 통해 수입된 중국 물건은 부산에 있는 왜관에서 네댓 배의 이문을 붙여 일본에 수출되었다. 그리고 그 대금은 은으로 결제되었다. 말하자면 이런 중개무역으로 조선은 큰 이익을 얻었고, 이렇게 얻어진 이익은 주로 서울과 근기 지역의 지배층 사대부와 중인층 수중에 떨어졌다.

이런 막대한 상업적 이익은 조선의 문화공간에서 두 가지 괄목할 만한 변화를 초래했다. 하나는 서적 및 서화골동을 수장收藏하고 완상하는 취향의 대두요, 다른 하나는 중인층의 소비적ㆍ향락적 문예 공간의 형성이다. 일본 막부가 18세기 중반 이후 정책을 바꿔 나가사키 항을 통해 중국과 직거래함으로써 이후 조선의 상업적 거품은 빠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18세기가 끝날 때까지 그 여파는 이어졌다.

 

 

  

 

  김홍도, 사인초상士人肖像.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작은 규모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다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3. 조선의 사대부, 개인 취향에 빠지다

4. 양인수의 취미가 경화세족과 다른 점

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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