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이 단락에 와서 비로소 집주인이 등장한다.
집주인은 몹시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권태로워지면 방에 벌렁 드러눕고, 자다가 일어나면 해가 어디쯤 걸렸나 하고 살핀다. 유감스럽게도 해는 아직 중천에 있다. 그는 하릴없는 섬돌 위로 나무 그늘이 옮겨 가는 모습이며 한낮에 우는 닭 울음소리 따위에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그것도 곧 싫증이 난다. 그러면 이제 방에 잔뜩 늘어놓은 기물들, 이를테면 거문고라든가 검이라든가 향로라든가 다관이라든가 고서화라든가 바둑판이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 소일을 한다. 검을 들고 와 안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그게 싫증이 나면 이번엔 거문고를 몇 곡조 타 보기도 하고, 술을 한 잔 따라 홀짝홀짝 마셔 보기도 하고, 좋은 향을 피워 놓고 가만히 차를 마셔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무료해진다. 그래서 이번엔 기보를 봐 가며 혼자 바둑을 두어 본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권태가 엄습하면서 하품이 나고 졸음이 쏟아진다. 이제 다시 벌렁 드러누워 잔다. 이때 객이 찾아와 주인을 찾는다. 꿈결에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앉아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보는데, 아직도 저놈의 해는 지지 않고 서산에 걸려 있다.
이처럼 이 단락은 집주인의 무료한 삶, 그 ‘하릴없음’을 곡진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얼핏 보아 집주인은 세속을 벗어나 산중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고인高人ㆍ일사逸士처럼 보인다. 그가 거처하는 방 안에는 온갖 고상하고 아취 있는 기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이 ‘갖추어짐’은 1편에서 ‘집은 작지만 있을 것은 다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말과 서로 호응한다. 그가 보여주는 이런 취미는 이른바 골동ㆍ예술 취향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런 취향은 특히 18세기 서울의 사대부들에게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개성은 서울과 가까운 곳이니,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예술 취향이 개성으로까지 확대되어 간 것일 터이다.
▲ 전문
▲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인용
2. 개성 지식인의 하릴없음
5.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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