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착각이 만든 인생, 착각이 만들 인생
그처럼 처음에 글을 쓰게 된 계기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그리고 그런 계기로 인해 지금까지도 글을 쓰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창조경제’ 버금가는 ‘창조인생’이라 할만하다.
▲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면 답답한 느낌이지만, 적어도 아주 제대로 착각한 덕에 지금은 그 덕을 보고 있다.
착각하라. 두 번 하라
때는 바야흐로 피는 끓어올라 주체할 수 없지만, 학교라는 공간에 갇혀 지내야만 했던 고딩 시절. 일기나 끼적끼적 써오던 나는 갑작스레 ‘나는 글을 잘 쓴다’는 밑도 끝도 모를 창조적인 착각에 빠지기에 이른다. 황당한 것은 그 착각을 뒷받침 해줄 만한 근거나 상황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착각은 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다행히도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여러 책을 무작정 읽기 시작했고, 그 글에서 받은 영감을 생각으로 정리하며 써나가기 시작했다. 병아리가 그저 삐약거리 듯, 깊이도 논리도 없이 그저 써 내려갔다. ‘습관이란 무섭죠♬’라는 노래의 가사를 ‘착각이란 무섭죠’라고 바꿔도 될 만큼, 적어도 그 순간엔 무언가에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흥겨우니까 쓰고, 뭔가 풀리지 않으니까 쓰고, 남겨야 하니까 쓰고, 말로 할 수 없으니까 쓰고, 뭔가 웅성거림이 있으니까 썼다. 아무도 나에게 ‘글을 잘 쓴다’고 말해준 적도 없었고, 여러 글쓰기 대회에서 시원하게 미끄러질 뿐이었지만 그래도 계속 쓸 수 있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가 될 테지만, 그와 같은 착각으로 지금까지 글을 써왔고, 앞으로 글을 써갈 것이니, ‘착각이 나를 글 쓰게 만들었다’는 말은 아주 정확한 말이라 할 수 있다.
▲ 착각엔 근거가 필요없다. 그걸 믿고 나갈 수만 있고 지치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2016년엔 신나게 써 재꼈다
여기에 덧붙여 2016년엔 여느 때에 비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글을 썼다. 예전 같으면 쓰지 않았을 학교 여행이나 매주 금요일마다 진행된 트래킹 여행에 대해서도 썼으며, 강의를 들은 것도 빠짐없이 남기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 이후부턴 나만 보기 위한 글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줘야 하는 글을 써야 하니, 부담감이 커졌던 게 사실이다. 그건 글을 잘 써야 하고, 뭔가 있어 보여야 한다는 부담이기도 했다. 여태까진 내가 보고 만족할 수 있는 글이면 됐지만, 이때부턴 다른 사람들이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글이어야 했다. 물론 힘겹게 글을 써서 학교 카페에 올릴 때면 사람들은 “글 잘 쓰네요. 잘 봤어요”라고 말해줬다. 당연히 그러면 기분도 좋아지고 뭔가 이제야 인정을 받는 것 같아 어깨가 한껏 올라가곤 했지만, 그런 만큼 부담은 더욱 커져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턴 아예 글을 쓰지 못하겠더라. ‘잘 써야 하는데 막상 쓰려니 아무 것도 안 써져’라는 갈등 때문에 쓰지 못했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 경우 ‘이렇게 자질구레한 일을 써도 되나’하는 자기검열 때문에 쓰지 못했으며, 강의 후기의 경우 ‘잘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내 식대로 쓰면 오히려 민폐 아니냐’라는 자책으로 쓰지 못했다. 그렇게 2011년부터 2015년 1학기까지 거의 4년 동안 거의 글을 못하고 보내게 됐다. 그러니 4년의 시간은 사진이나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안개가 짙게 낀 거리를 바라보듯 아련하고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런 상황이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보여행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도보여행은 하는 내내 여행기를 썼고, 다녀와서는 바로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러니 그걸 읽는 것만으로도 다시 도보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현장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4년의 일들은 훨씬 최근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더욱 과거처럼 흐릿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작년엔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려 노력했었던 것 같다.
▲ 4년의 시간은 여백처럼 비어 있다.
착각이 만든 인생을 누리다
착각했기 때문에 글을 쓰게 됐고, 글을 쓰다 보니 어느덧 나 자신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고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올해 그런 흐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지나는 모든 것, 경험하는 모든 것, 배우는 모든 것을 되도록 담아보려 한다.
작년에 쓰던 글 중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이 무려 세 편이나 된다. 보통 한 번 시작하면 꼭 끝을 보고나서야 다른 것을 하는 성격 때문에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작년엔 확실히 능력에 비해 욕심이 너무 과했다. 우치다쌤의 ‘공생의 필살기’는 이미 2015년 10월에 썼던 후기지만,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육’ 후기처럼 내용을 보강하고 새롭게 편집하기 위해 지금은 블로그에서 글을 내려놓은 상황이며, 2007년에 떠났던 ‘대학생 실학순례’는 3박 4일의 일정 중 겨우 첫째 날 여행기만을 쓰다가 잠시 멈춘 상황이며, 작년 2학기에 들었던 동섭쌤의 ‘아마추어 사회학’은 총 네 번의 강의 중 첫 번째 강의 후기만을 마친 상황이다. 그리고 2년 전에 쓰다가 멈춘 연암에 대한 글까지 있으니, 흐름이 끊긴 글들을 다시 쓰며 올 한해의 글쓰기를 시작할 것이다.
쓰고 싶은 글도 많고 써야 할 글도 많으니, 참으로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20년 전에 했던 착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 2017년엔 자뻑이라고 해도 좋으니, 좀 더 자신에게 긍정적인 착각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 혹시 아는가? 20년 후엔 정말 그런 자신이 되어 있을지 말이다.
▲ 지는 해인가, 뜨는 해인가. 결국 끝은 시작으로 이어지고, 시작은 끝을 향해 간다. 그러니 지금 시작할 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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