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한 문장력을 지닌 도은 선생의 유고집을 왕명에 의해 간행하다
도은이선생문집서(陶隱李先生文集序)
권근(權近)
문장은 세도에 달려 있지만 독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文章隨世道升降, 是盖關乎氣運之盛衰, 不得不與之相須. 然往往傑出之才有不隨世而俱靡, 掩前光而獨步者矣.
昔屈原之於楚, 淵明之於晉, 雖當國祚衰替之季, 而其文章愈益振發, 曄然有光. 且其節義凜凜, 直與秋色爭高, 足以起萬世臣子之敬服, 其有功於人倫世敎爲甚大, 獨其文章可尙乎哉
이숭인 선생은 고려말의 독보적인 문장가였다
星山陶隱李先生生於高麗之季, 天資英邁, 學問精博, 本之以濂洛性理之說, 經史子集百氏之書, 靡不貫穿, 所造旣深, 所見益高, 卓然立乎正大之域, 至於浮屠ㆍ『老』ㆍ『莊』之言. 亦莫不硏究其是否. 敷爲文辭, 高古雅㓗, 卓偉精緻, 以至古律倂儷, 皆臻其妙, 森然有法度.
韓山牧隱李文靖公每加歎賞曰: “此子文章, 求之中國, 世不多得, 自有海東文士以來鮮有其比者也.”
甞再奉使如京師, 中原士大夫觀其著述, 接其辭氣, 莫不歎服. 有若豫章周公倬ㆍ吳興張公溥ㆍ嘉興高公巽志, 皆有序跋以稱其美, 是豈唯見重於一國, 能鳴於一時而已者哉. 眞所謂掩前光而獨步者矣
왕명에 의해 선생의 유고집을 간행하다
高麗有國五百年, 休養生息, 涵濡作成, 人才之多, 文獻之美, 侔擬中華. 然其名世者未有若牧隱之盛ㆍ陶隱之雅者焉.
是至衰季, 而其文章乃益振發, 是必數百年休養之澤, 卒萃於是而終之也歟.
及我朝鮮, 王業方亨, 而先生屛居于野. 我太上王受命之後, 愛惜其才, 將欲徵用, 而先生乃卒. 嗚呼惜哉!
先生甞典成均之試, 今我主上殿下之在潛邸也, 登其科目. 嗣位之後, 每臨經筵, 悼念甘盤之舊, 追加封贈, 爵其二子, 以躋顯仕. 又命印其遺藁, 期於不朽, 其所以尊禮師儒, 崇重文獻, 而褒奬節義者至矣. 斯一擧而數善幷焉, 宜我殿下拳拳於此也.
臣近承命, 不敢以辭, 姑書此以爲序.
永樂四年十月下澣. 『陽村先生文集』 卷之二十
해석
문장은 세도에 달려 있지만 독보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文章隨世道升降,
문장이란 세도(世道)의 오르내림에 따르게 되니
是盖關乎氣運之盛衰, 不得不與之相須.
이것은 대체로 기운의 성쇠와 관련되어 있어 부득불 그것과 함께 서로 영향을 미친다.
然往往傑出之才有不隨世而俱靡,
그러나 이따금 걸출한 재주의 사람이 세상에 따르지 않고 모두 아름다워
掩前光而獨步者矣.
선배들의 위광을 덮고서 독보하기도 한다.
옛적에 초나라에 있어서 굴원과 진나라에 있어서 도연명이
雖當國祚衰替之季, 而其文章愈益振發,
비록 나라의 조짐이 쇠퇴해가는 말기에 당하여서도 문장은 더욱 더 떨치고 발휘되어
曄然有光.
환하게 빛이 났다.
且其節義凜凜, 直與秋色爭高,
또한 절의가 늠름하여 곧바로 가을색과 높음을 다투어
足以起萬世臣子之敬服,
만세토록 신하들이 경탄하며 복종하는 걸 일으키기에 족하고
其有功於人倫世敎爲甚大,
인륜과 세교에 공이 있음이 매우 컸으니,
獨其文章可尙乎哉
유독 문장만이 숭상할 만한 것이었겠는가.
이숭인 선생은 고려말의 독보적인 문장가였다
성산 도은 이선생은 고려의 말기에 태어나
天資英邁, 學問精博,
천부적 자질이 영특하고 학문이 정밀하며 넓어
本之以濂洛性理之說, 經史子集百氏之書, 靡不貫穿,
성리학【염락(濂洛):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준말이다. 송대(宋代) 성리학의 주요 학파로,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ㆍ정이(程顥),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성리학을 가리키는 말이다.】의 설에 근본하고 경전과 역사서 제자백가의 책을 관통하지 않음이 없어
所造旣深, 所見益高,
나아간 것이 이미 심오하고 본 것이 더욱 높아
卓然立乎正大之域,
우뚝하게 공정하고 의젓한 경지에 섰으며
부도와 『노자』ㆍ『장자』의 말에 이르러서도 또한 옳고 그름을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敷爲文辭, 高古雅㓗,
펴서 문장과 말을 지음에 고상하고 예스러우며 우아하고 맑았으며
卓偉精緻, 以至古律倂儷,
탁월하고 위대하며 정밀하고 치밀하였으며 고율과 변려에 이르러서도
皆臻其妙, 森然有法度.
모두 오묘함에 이르렀으니 정연한 법도가 있었다.
韓山牧隱李文靖公每加歎賞曰:
한산 목은 이문정공은 매번 칭찬하며 말씀하셨다.
“此子文章, 求之中國, 世不多得,
“자네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세상에 많이 구할 수 없고
自有海東文士以來鮮有其比者也.”
우리나라에 글 짓는 선비가 있는 이래로부터 비교할 만한 사람이 드물다.”
甞再奉使如京師, 中原士大夫觀其著述,
일찍이 두 번 사신의 명을 받들고 중국에 갔는데 중원의 사대부들이 저술한 걸 보고
接其辭氣, 莫不歎服.
말의 기운을 접하고선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有若豫章周公倬ㆍ吳興張公溥ㆍ嘉興高公巽志,
예장 사람 주탁과 오흥 사람 장부와 가흥 사람 고손지와 같은 이들이
皆有序跋以稱其美, 是豈唯見重於一國,
모두 서문과 발문을 지어 뛰어남을 칭송했으니 이것이 어찌 유독 한 나라에서 중요하게 보고
能鳴於一時而已者哉.
한 때에만 울렸을 뿐이겠는가.
眞所謂掩前光而獨步者矣
참으로 말했던 선배들의 위광을 덮고서 독보한 사람이로다.
왕명에 의해 선생의 유고집을 간행하다
高麗有國五百年, 休養生息,
고려라는 나라가 있은 지 500년에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휴양(休養): 조세를 경감하여 백성의 재력을 넉넉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 편안히 쉬면서, 지치거나 병든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활력을 되찾음】 잘 지내게 하고
涵濡作成,
윤택하게 해주어 이루어주니
人才之多, 文獻之美, 侔擬中華.
인재가 많아지고 문헌이 아름다워져 중화에 짝할 만했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난 사람들은 목은의 성대함과 도은의 우아함에 같지 못했다.
是至衰季, 而其文章乃益振發,
이에 말기에 이르러 문장은 곧 더욱 떨쳐 발휘되었으니
是必數百年休養之澤, 卒萃於是而終之也歟.
이것은 반드시 수백년의 길러준 은택이 마침내 이에 모여 끝장 나는 것인가.
及我朝鮮, 王業方亨,
우리 조선에 이르러 왕의 위업이 잘 이루어졌지만
而先生屛居于野.
선생은 물러나 시골에 거처하고 있다.
我太上王受命之後, 愛惜其才,
우리 태상왕께서 명을 받은 후로 선생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將欲徵用, 而先生乃卒.
장차 불러 등용하려 했지만 선생은 곧 돌아가셨다.
嗚呼惜哉!
아 애석하구나!
先生甞典成均之試,
선생은 일찍이 성균의 시관(試官)을 맡았을 때
今我主上殿下之在潛邸也,
지금 우리의 주상전하께서 세자로 있어
登其科目.
그 과거에서 급제하셨다.
嗣位之後, 每臨經筵,
즉위한 이후 매번 경연에 나올 때면
悼念甘盤之舊, 追加封贈,
스승【감반(甘盤): 은(殷) 고종(高宗)의 스승이었는데, 고종이 천위(踐位)한 후 정승을 삼았으므로, 후에는 즉위하기 전의 임금의 스승을 감반이라 부르게 되었다.】의 옛날을 애도하며 생각해 봉작(封爵)과 증직(贈職)을 추가하셨고
爵其二子, 以躋顯仕.
두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현달한 직위에 오르게 하셨다.
又命印其遺藁, 期於不朽,
또한 유고를 간행하라 명하시어 불후하길 기대하셨으니
其所以尊禮師儒, 崇重文獻,
스승을 존경하고 예우하고 문헌을 높이고 중하게 여기셨으니
而褒奬節義者至矣.
절의를 기리고 장려한 것이 지극하도다.
斯一擧而數善幷焉, 宜我殿下拳拳於此也.
하나를 들어 여러 좋은 일이 나열되니 마땅히 우리 전하께선 이에 정성을 다하신 것이로다.
臣近承命, 不敢以辭,
신하 권근은 왕명을 받들어 감히 사양치 못하고
姑書此以爲序.
짐짓 이걸 써서 서문을 짓노라.
永樂四年十月下澣. 『陽村先生文集』 卷之二十
영락 4(1406)년 10월 하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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