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자로 표현된 장유의 심리학 보고서
『소화시평』 권하 63번의 주인공은 장유다. 지금의 나에게 계곡 장유는 「회맹후반교석물사연양공신사전(會盟後頒敎錫物賜宴兩功臣謝箋)」이라는 악명 높은 글을 쓴 장본인으로 남아 있다. 한문실력이 좋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웬만한 글들은 여러 가지를 조합하다보면 해석이 되는 정도다. 하지만 이 글은 길지도 않음에도, 그리고 해석본까지 참고하면서 보는 데도 도무지 해석도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곳 투성이다. 임금께 드리는 글답게 전고(典故)가 가득 차 있어 산 넘어 산이듯 전고를 지나면 또 다시 전고가 나오는 상황이 반복되니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썼냐고 따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막고 품는 수밖에 없다.
이렇듯 나에겐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데 홍만종이 볼 때 계곡의 시는 정말 좋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러니 아예 그를 ‘문장의 대가’라고 추겨 세울 정도이고 김상헌의 서문까지 인용하며 그런 논거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장유의 글이나 시에 대해 본 것들이 적으니, 그리고 유독 봤던 글이 너무도 어려워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으니 홍만종과는 달리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叢篁抽筍當階直 | 대밭에서 뻗어난 죽순은 계단 아래에 당도하여 곧게 솟았고 |
乳燕將雛掠戶斜 | 제비는 새끼 먹이려고 문을 스쳐나네. |
自笑蓬蒿張仲蔚 | 절로 우습구나, 봉호의 장중울은 |
平生不識五侯家 | 평생 권세라곤 알지 몰랐었다지. |
그렇다면 홍만종이 그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래서 이번 편에 실려 있는 시를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솔직히 말해서 이 시를 손수 해석했을 때도, 그리고 수업을 듣고 해석을 교정했을 때도 의미가 분명하게 오진 않았다. 3~4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장중울 같은 삶을 추구하고 싶나 보다’라는 느낌만 들 뿐이지, 1~2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3~4구의 내용을 통해 1~2구의 내용을 역추적해보니 연결된 흐름이 보이긴 한다. 이게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해한 방식 그대로 한 번 이 시를 풀어보며 이야기를 전개하겠다.
장중울은 학문에도 박식하고 시문도 잘 지었지만 궁핍하게 살았고 일상을 돌보지 않아 그의 마당엔 쑥대가 사람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학문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부귀영달엔 전혀 무관심한, 그래서 안빈낙도의 표본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3구의 시작에선 ‘자소(自笑)’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만 해석을 해보면 ‘절로 우습다’라는 표현이 되는데, 이 표현만 봐선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우습다는 말인지, 장중울처럼 그렇게 정원의 쑥대가 자랄 정도로 놔둔 그의 무관심이 우습다는 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업을 하면서 그건 장유 자신에 대한 자조의 웃음이란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1~2구는 3~4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메시지로 풀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1~2구의 내용을 통해 욕망에 대한 얘기를 했고 3구에 들어서면서 ‘그런 내가 우습다’라고 말하며 장중울의 무소유에 대한 얘기를 해야 논리전개 상 맞아떨어지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엔 1~2구가 그저 보여지는 광경을 읊은 건 줄만 알았다. ‘그러니 왜 늘상 보던 광경을 핍진하게 담아내다가 갑자기 3구에서 우습다고 한 거지?’라는 의문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1~2구가 욕망이 투영된 구절이라고 한다면 1~2구의 해석도 좀 더 심층적으로 해볼 수가 있다. 즉 1구에서 말한 계단에 닿아 곧게 뻗은 대나무는 단순한 대나무는 아니란 말이다. 더욱이 계단에 이르러 쭉 뻗었다고 했으니 그건 장유의 영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분명히 장유 스스로는 ‘난 출세욕이 없어’라고 말하곤 했을 테지만 막상 계단 앞에 쭉 솟아난 대나무를 보고선 자신을 이입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2구도 매우 명확해진다. 제비는 그냥 날아다니지 않는다. 지금 새끼를 먹이려 문을 스쳐나는 것이다. 왜 하고 많은 배경 중에 새끼에게 먹일 주려는 제비에 시선이 가닿은 것일까? 이것 또한 자신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자신 또한 제비처럼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벼슬자리에서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나무를 통해선 자신의 출세욕을 확인한 것이고 제비를 통해선 현실에 얽매여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분주함을 확인한 것이다. 아마 초반엔 왜 대나무와 제비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스스로도 대나무와 제비를 통해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랐겠지.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자조일 수밖에 없고 그건 시구로 표현되면 ‘자소(自笑)’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해하니 1구부터 4구까지가 장유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시처럼 읽힌다. 홍만종은 이 시를 평가하며 ‘한 무늬만 봤을 뿐인데 호랑이 무늬인지 표범의 무늬인지 알 수 있다[可以見一斑而知虎豹之文].’고 표현했다. 즉 이 시 한 편을 통해 장유 시 전체의 우뚝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 한 편은 ‘21자로 표현된 심리학 보고서’라는 건 알 것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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