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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3. 21자로 표현된 장유의 심리학 보고서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3. 21자로 표현된 장유의 심리학 보고서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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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자로 표현된 장유의 심리학 보고서

 

 

소화시평권하 63의 주인공은 장유. 지금의 나에게 계곡 장유는 회맹후반교석물사연양공신사전(會盟後頒敎錫物賜宴兩功臣謝箋)이라는 악명 높은 글을 쓴 장본인으로 남아 있다. 한문실력이 좋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웬만한 글들은 여러 가지를 조합하다보면 해석이 되는 정도다. 하지만 이 글은 길지도 않음에도, 그리고 해석본까지 참고하면서 보는 데도 도무지 해석도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곳 투성이다. 임금께 드리는 글답게 전고(典故)가 가득 차 있어 산 넘어 산이듯 전고를 지나면 또 다시 전고가 나오는 상황이 반복되니 말이다.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썼냐고 따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막고 품는 수밖에 없다.

 

이렇듯 나에겐 어려운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데 홍만종이 볼 때 계곡의 시는 정말 좋게 느껴졌었나 보다. 그러니 아예 그를 문장의 대가라고 추겨 세울 정도이고 김상헌의 서문까지 인용하며 그런 논거를 뒷받침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장유의 글이나 시에 대해 본 것들이 적으니, 그리고 유독 봤던 글이 너무도 어려워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으니 홍만종과는 달리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叢篁抽筍當階直 대밭에서 뻗어난 죽순은 계단 아래에 당도하여 곧게 솟았고
乳燕將雛掠戶斜 제비는 새끼 먹이려고 문을 스쳐나네.
自笑蓬蒿張仲蔚 절로 우습구나, 봉호의 장중울은
平生不識五侯家 평생 권세라곤 알지 몰랐었다지.

 

그렇다면 홍만종이 그렇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래서 이번 편에 실려 있는 시를 중심으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솔직히 말해서 이 시를 손수 해석했을 때도, 그리고 수업을 듣고 해석을 교정했을 때도 의미가 분명하게 오진 않았다. 3~4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장중울 같은 삶을 추구하고 싶나 보다라는 느낌만 들 뿐이지, 1~2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3~4구의 내용을 통해 1~2구의 내용을 역추적해보니 연결된 흐름이 보이긴 한다. 이게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해한 방식 그대로 한 번 이 시를 풀어보며 이야기를 전개하겠다.

 

장중울은 학문에도 박식하고 시문도 잘 지었지만 궁핍하게 살았고 일상을 돌보지 않아 그의 마당엔 쑥대가 사람 키만큼이나 자라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학문에만 관심이 있을 뿐, 부귀영달엔 전혀 무관심한, 그래서 안빈낙도의 표본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3구의 시작에선 자소(自笑)’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만 해석을 해보면 절로 우습다라는 표현이 되는데, 이 표현만 봐선 아리송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우습다는 말인지, 장중울처럼 그렇게 정원의 쑥대가 자랄 정도로 놔둔 그의 무관심이 우습다는 말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업을 하면서 그건 장유 자신에 대한 자조의 웃음이란 걸 알게 됐다.

 

그렇다면 1~2구는 3~4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메시지로 풀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1~2구의 내용을 통해 욕망에 대한 얘기를 했고 3구에 들어서면서 그런 내가 우습다라고 말하며 장중울의 무소유에 대한 얘기를 해야 논리전개 상 맞아떨어지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엔 1~2구가 그저 보여지는 광경을 읊은 건 줄만 알았다. ‘그러니 왜 늘상 보던 광경을 핍진하게 담아내다가 갑자기 3구에서 우습다고 한 거지?’라는 의문점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1~2구가 욕망이 투영된 구절이라고 한다면 1~2구의 해석도 좀 더 심층적으로 해볼 수가 있다. 1구에서 말한 계단에 닿아 곧게 뻗은 대나무는 단순한 대나무는 아니란 말이다. 더욱이 계단에 이르러 쭉 뻗었다고 했으니 그건 장유의 영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분명히 장유 스스로는 난 출세욕이 없어라고 말하곤 했을 테지만 막상 계단 앞에 쭉 솟아난 대나무를 보고선 자신을 이입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2구도 매우 명확해진다. 제비는 그냥 날아다니지 않는다. 지금 새끼를 먹이려 문을 스쳐나는 것이다. 왜 하고 많은 배경 중에 새끼에게 먹일 주려는 제비에 시선이 가닿은 것일까? 이것 또한 자신의 투영이라 할 수 있다. 자신 또한 제비처럼 식구들을 먹이기 위해 벼슬자리에서 동분서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나무를 통해선 자신의 출세욕을 확인한 것이고 제비를 통해선 현실에 얽매여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분주함을 확인한 것이다. 아마 초반엔 왜 대나무와 제비에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 스스로도 대나무와 제비를 통해 동질감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랐겠지.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자조일 수밖에 없고 그건 시구로 표현되면 자소(自笑)’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해하니 1구부터 4구까지가 장유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시처럼 읽힌다. 홍만종은 이 시를 평가하며 한 무늬만 봤을 뿐인데 호랑이 무늬인지 표범의 무늬인지 알 수 있다[可以見一斑而知虎豹之文].’고 표현했다. 즉 이 시 한 편을 통해 장유 시 전체의 우뚝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 한 편은 ‘21자로 표현된 심리학 보고서라는 건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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