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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를 여러 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를 여러 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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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를 여러 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이유

 

 

소화시평권하 64의 첫 번째 시는 최치원의 등윤주자화사(登潤州慈和寺)라는 시다. 이 시는 워낙 유명해서 문학사를 다루는 책이나 한시를 다루는 책에선 빠짐없이 인용되는 시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까지 아무리 못해도 10번 이상은 읽었을 것이고 그만큼 내용도 분명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선 기존에 읽던 방식대로 시를 읽게 되어 있고 그 방식대로 발표 준비를 하게 되어 있다. 당연히 그 방식이 옳은 줄만 아니, 지금까지 이해한 방식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스터디를 하면서 기존에 이해한 방식이 얼마나 많은 걸 놓치게 만들고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일전에 트위스트 교육학이란 강의를 들었을 때 박동섭 교수는 롤랑 바르트와 우치다 타츠루의 무지에 대한 정의를 들려준 적이 있는데, 기존에 알던 정의와 너무도 달랐지만 현실을 정확히 짚어낸 것 같아 감탄을 했던 적이 있다. 거기서 롤랑바르트는 지식이 꽉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것이 없는 것이 무지다라고 말했으며, 우치다쌤은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한 결과라고 말했던 것을 인용한 것이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무지 또는 무식이란 전혀 알고자 하지 않는 마음’, ‘지식을 이해할 마음가짐이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일수록 좀 더 배워야 한다고, 좀 더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롤랑바르트는 무지란 지식이 없는 게 아닌 이미 너무도 많은 지식이 꽉꽉 차서 전혀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이라 보았으며, 우치다 타츠루 또한 자포자기가 아닌 엄청나게 노력한 결과라 보았다. 그만큼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지식을 쌓게 되어 있다는 얘기이고 그렇게 쌓인 지식만이 절대 진리라 믿어 그와 반대되는 지식이나 그 모든 것을 일거에 거부할 수 있는 지식 따위엔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자신이 지닌 지식을 고수하려 노력하고 노력한 결과 무지해졌다는 얘기다.

 

이 말처럼 이 시를 공부해갈 때의 내 모습은 확실히 무지한 상황이었다. 무려 10번이 넘게 봤다고 자부했으면서도 처음에 이해한 방식에 따라 두 번 볼 때에도 10번을 볼 때에도 똑같이 적용하며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바로 이런 관성이 무서운 것이다. 관성에 따르게 되면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 무얼 오해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며, 반복적으로 그런 방식을 고수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운이 좋게도 그런 무지의 순간을 마침내 스터디를 함께 하며 깰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부분을 잘못 보고 있었는지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

 

 

 

 

 

登臨暫隔路岐塵 높이 올라 잠시나마 속세 먼지 떠났지만
吟想興亡恨益新 흥망을 생각하니 한이 더욱 더치네.
畫角聲中朝暮浪 뿔 나팔 소리 속에 아침저녁 물결 치고
靑山影裏古今人 청산 그림자 속에서 고금의 인간 무상해라.
霜摧玉樹花無主 서리에 시든 옥수의 꽃은 주인이 없고
風暖金陵草自春 바람 따순 금릉에는 풀만 절로 봄이로다.
賴有謝家餘境在 사씨 집안 남은 모습 있어서
長敎詩客爽精神 길이 시인으로 하여금 정신을 슬프게 만드누나. 孤雲先生文集卷之一

 

수련(首聯) ~ 경련(頸聯)까지는 기존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련(首聯)에선 자화사에 오르고 보니 티끌 낀 세상과는 멀어진 듯해 안심이 되긴 하지만 한스러운 감정이 더욱 짙어진다는 얘기를 했다. 이때 처음으로 더치다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다. ‘나아가다가 다시 나빠지다라는 뜻을 지닌 이 서술어를 김형술 교수는 2구의 해석에 활용하며 흥망을 생각하니 한이 더욱 더치네.’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감은 한스러운 마음이 두 배 세 배 강하게 느껴진다는 느낌을 풀이한 것이다.

 

과연 한스러운 감정은 왜 생긴 것일까? 그건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에 아주 잘 드러난다. 윤주는 예로부터 전쟁이 있던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서면 전쟁으로 스러져간 뭇 사람들의 애끓는 마음이 느껴질 밖에 없다. 화각(畫角) 소리 속에 아침저녁으로 물결 치는 자연의 무상함 너머로 청산의 그림자 속엔 무수히 스쳐간 뭇 사람들의 유상함이 대비된다. 자연은 이다지도 무심하게 반복되듯 흘러가는데 사람만은 이곳을 차지하겠다고 더 큰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전쟁을 벌이고 역사 속에 사라져간 것이다. 무상과 대비되는 유상함이 심정을 울적하게 만드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경련(頸聯)에도 이 정감은 그대로 이어진다. ‘서리에 시든 옥수, 꽃은 주인이 없다라는 구절은 뒤뜰에 아름다운 나무 꽃이 폈지만 꽃은 펴도 다시 오래가지 않아요[玉樹後庭花 花開不復久].’라는 구절을 받는 것으로 진() 후주(後主)의 궁녀가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아름다움은 한 때 뿐이니 이때를 놓치지 마셔요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런 노래를 불렀고 그런 노래들을 모아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라는 악곡까지 만들었던 사람은 이젠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는 노래를 남겨 자신의 권력을 드러냈을진 몰라도 그 사람은 이제 이 자리에 있지도 않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금릉의 따스한 봄바람에 풀은 절로 자라나 녹색으로 뒤덮고 있다. 풀만 덩그러니 있고 사람은 사라진 이런 풍경은 이색의 부벽루(浮碧樓)라는 한시에서 느낀 그대로다. 함련과 경련에서 자연과 인간의 완벽한 대조를 통해 최치원이 느꼈을 한이 무엇 때문에 나온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니 홍만종은 함련(頷聯)을 인용하고서 나는 일찍이 감개함을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余未嘗不歎其感慨].’라고 비평한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미련(尾聯)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었다. 나는 일반적인 해석대로 앞에서 쭉 이어온 한스런 감정이 미련에선 안도감으로 바뀌어 그나마 희망차게 마무리 짓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그나마 윤주엔 사령운이나 사조 집안의 남은 운치가 있어 자신에게 그나마 정신을 상쾌하게 한다는 메시지로 읽은 것이다. 그도 그럴 듯이 앞 부분이 너무나 비분강개하고 한스러웠기에 이렇게 마치면 너무도 슬픔만이 강조되는 것 같아 마지막 연에서 그나마 희망찬 어조로 마무리 짓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그런 식으로 정감을 급작스럽게 바꾸는 건 매우 어색하다고 얘기해주신다. 그건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영화나 드라마에서 중반까지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 과연 그걸 어떻게 해결해나가고 결말 짓나 보자라는 심정으로 끝까지 참고 봤더니 허무하게도 신이 개입하여 일거에 해결되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린 영화의 결말이 깔끔하다고 생각하기보다 괜히 시간 낭비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스토리가 정말로 최악이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처럼 한시도 무려 시작부터 3/4 지점까지 한스러운 감정을 말하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해피엔딩을 급하게 맺는 건 무척이나 허무하게 만들고 한시의 미감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 이 시를 해석하자면 당연히 미련(尾聯)도 우수에 찬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은 ()’이란 한자를 유의하며 보아야 한다고 말해줬다. 보통 이 한자는 상쾌하다와 같이 긍정적인 감정을 받는 글자로 풀이하지만 여기선 ()’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단다.

 

長敎詩客爽精神
길이 시인으로 하여금 정신을 상쾌하게 하는 구나. 길이 시인으로 하여금 정신을 슬프게 만드는 구나.

 

글자 하나의 해석이 달라졌을 뿐이지만 전체적인 정감은 확연히 달라졌다. 그리고 위에서도 쭉 말했다시피 이렇게 보면 시의 정감이 수미일관(首尾一貫)하게 된다.

 

역시나 사람이 내뱉는 말이나 문학작품이나 단순하지가 않다. 그래서 같은 한자에도 상반된 뜻이 모두 들어있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그건 곧 자신의 감정이 그 당시에 어떠냐에 따라 충분히 180도 다른 감정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얼마나 그 상황에 몰입하여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처럼 지금까지의 해석과는 180도 다른 해석을 하며 한시를 느껴볼 수 있다는 것도 안다는 즐거움의 한 단면일 테고, 문학을 끊임없이 읽으며 공부해야 하는 이유일 테다. 한 번 봤다는 이유만으로 안다고 착각하지 말고 맛이 느껴질 때까지 맛보려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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