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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1. 스님이 보고 싶었던 동악의 시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1. 스님이 보고 싶었던 동악의 시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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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보고 싶었던 동악의 시

 

 

소화시평권하 61에선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스님에게 준 시 네 편을 모아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미 앞선 편에서 호음이 준 시동고가 준 시를 보며 어떤 부분이 이색적이었는지를 살펴봤기에, 이젠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람인 동악시를 중심으로 살펴볼 차례다.

 

 

老來何事喜逢僧 늘그막에 무슨 일로 스님 보길 좋아하나?
欲訪名山病未能 명산을 방문하려 해도 병들어 할 수 없어서지.
花落矮簷春晝永 꽃 지는 낮은 처마엔 봄날이 기나긴데,
夢中皆骨碧層層 꿈속에서 개골산은 층층이 푸르더이다.

 

동악의 시1~2구가 하나로 이어져 의미를 만들어낸다. 마치 이백의 산중답인(山中答人)이라는 시처럼 1구에서 스스로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자문자답의 형식이지만 이런 형식이 사람을 집중시키기엔 더 없이 좋다. 그저 평이하게 흘러가는 문장보단 부정형으로 짜여진 문장이나 감탄이나 의문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민들레 모임에 갔을 때 제비꽃님은 뇌과학을 공부하며 알게 된 얘기를 주로 해줬었다. 그때 주의(attention)하게 만드는 수업에 대해 알려줬었는데 거기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자신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어야 하며 둘째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어야 해요.” , 익숙한 패턴이 아닐 때 주의집중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게 계속 유지될 수 있으려면 저게 나에게 유용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시를 짓는 자리에서 두 번째 나에게 유용하냐의 척도는 그다지 필요 없을 것이다. 누구나 수창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용성 자체는 논외로 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나 처음에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동악의 이 시는 1구부터 질문을 던지며 들어가기에 저절로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묘미가 있다.

 

왜 느즈막한 나이에 스님 보길 좋아하냐고 물으니, 2구에선 그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그건 확실히 1구에서 밝힌 늙어가니[老來]’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지금으로 보자면 인과가 매우 분명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늙으면 당연히 병도 들었을 것이고 거동도 불편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고, 자주 못 보는 만큼 더 간절히 그리워진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삶엔 아이러니가 요소요소에 마치 선물처럼 숨어 있다. 자주 못 보기에 더 자주 보고 싶어지고, 우환 속에 있어야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으며[生於憂患而死於安樂], 적들에 둘러싸인 상황에 있어야 나라가 망하지 않고 더 오래 보전될 수 있다(다산의 고구려론高句麗論)는 아이러니 말이다. 그런데 왜 이걸 선물이라고 얘기하냐면 그런 아이러니를 통해 삶을 좀 더 주체적이게 되며 매 순간의 순간을 느낄 수 있도록 오감이 활짝 열려가기 때문이다. 예전에 건강할 땐 그저 맘만 먹으면 볼 수 있던 스님이었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제약이 걸린 순간부턴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 이치처럼 말이다.

 

3구에선 이런 내면으로 파고드는 정서에서 시점을 외부의 배경으로 이동시킨다. 내면으로만 파고들던 감정은 누그러뜨리고 외부의 환경을 보니 어느덧 성큼 다가온 봄과 활짝 피어난 꽃들이 낮은 처마에 저물어가는 광경이 눈에 보인다. 마치 와호장룡이란 영화에서 환상적으로 그려진 낙엽 지는 배경처럼 이곳도 환세계(幻世界)인냥 낮은 처마에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봄을 지나가는 계절엔 낮마저도 길기만 하니, 그걸 보던 시적자아는 어느 순간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나 보다. 원래 간절히 원하면 꿈속에서 보이는 것처럼 스님이 계신 금강산을 유람하는 꿈을 꿨고 개골산에 봄이 한가득 내려 층층이 푸르디 푸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결국 이 시를 통해 동악은 스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리고 스님이 계신 금강산에 가고 싶다는 마음까지 한 번에 표현해냈다. 28자의 글자 속에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이건 여담이지만 교수님은 장난스레 이 시를 받은 스님은 울상을 지었을지도 몰라요. 그 당시 금강산 기행엔 스님들이 견여(肩輿)에 양반을 태우고서 유람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 시가 스님들에겐 나 금강산 갈 테니 나 좀 안내해줘라는 말로 들렸을 수도 있거든요. 조선시대만 해도 스님은 양반들에게 대우를 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으니 문화사적으로 그럴 수 있는 개연성도 충분히 있습니다.”리고 말씀해주셨다. 바로 이런 주제들이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싶은 주제긴 하다. 조선 양반에게 스님이란 어떤 존재였을까? 자신의 맘껏 부릴 수 있는 하수인이었던 걸까? 전혀 다른 세상의 깨달음을 탐구하며 정진하는 정신적 도반의 위치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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