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
아마도 발악이었을 듯하다. 이렇게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더 이상 이렇게 살긴 싫다는 발악 말이다. 현실이 답답했던 것일까? 당연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이었기에 답답하지 않을 리 없었다.
떠남은 발악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런 외부적인 여건보다 내 자신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답답했던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있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긴 하지만 관성에 끌려 마지못해 살아가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거기에 앞뒤가 꽉꽉 막혀 안절부절하는 내 자신이었으니 용케도 이제까지 버텨온 게 신기할 뿐이었다. 그와 같은 답답함 속에 안주(내팽개쳐 두고)하며 살아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소멸되어 가고 생의 의지는 희미해져 갔다. 바로 이것이 한계로 치달으면서 발악을 하게 된 주요 요인이다.
애초에 의식 기반이 문제였다. 삶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해도 최악이지만도 않다. 행복은 미래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여기에 있을 수도 있다. 무얼 해보기도 전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게 된다. 맞다, 그 말들이. 하지만 정확히 그와 같은 사고방식에 갇혀 나 자신의 가능성과 현재의 행복, 그 모든 걸 미래로 무한정 밀어두고 온갖 불행을 자초하였던 거다. 그때부터 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행복을 자초하다
그때 내가 해야 했던 일은 그런 잘못된 기반을 전복시키는 일이었다. 내 스스로 불행을 자초(自招)했다면 그 반대로 행복을 자초(?)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게 되기 위해선 기존의 사고방식을 대체할만한 철학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주구장창 책을 읽으며 나만의 철학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의 철학을 만들어가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들은 고미숙, 강신주, 고병권, 체 게바라, 연암, 장자 등이 있다. 카르페디엠(Carpe Diem)의 정신이 구현되는 생기 가득한 현실에 살아가던 그 분들 덕에 나도 현재를 긍정하게 되었다.
거기에다 덤으로 우연성을 긍정하며 그런 세상에 몸을 맡겨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했던 건 역시나 실천력이다.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10.18. ~ 1941.01.04)은 ‘생각하는 인간으로 행동하되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생각하라’고 말했었다. 흔히 하는 말로 ‘행사일치(行思一致)’가 그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행동하기 위해선 자신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감정만 앞세운 나머지 앞뒤 재지 않고 행동한다면 그건 나 자신 뿐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아선 안 된다. 현실에 기반을 두고 실천 가능한 생각들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생각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은 빛이 나리라. 위기철씨가 쓴 『아홉 살 인생』에서의 골방철학자는 후자의 모습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에 불과했던 거다. 나 역시 지금은 그 골방철학자와 같은 모양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의 의식 기반을 전폭적으로 수정하고 현실과 나의 이상의 접점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기로 했다.
떠남을 응원해준 인연들
이걸 결정하기까진 세 인연의 도움이 컸다.
첫째 인연은 구선미다. 이 친구는 늘 현실에 붙들려 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행기를 읽으며 의식의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도 몇 번에 걸쳐 여행기를 보내주곤 했다. 그렇게 몇 권을 읽었을 땐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생각만 했었는데 최근에 보내준 이병률씨가 쓴 『끌림』이란 책을 읽고서는 ‘나도 한번 떠나볼까?’라는 좀 직접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건 의식의 클리나멘이었다. 한번 엇나간 생각은 파도에 파도를 탔다. 과연 어떻게 변해갈 것이며 어떻게 확장되어갈 것인가? 그런 가운데 예전에 한비야씨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를 읽고서 ‘나도 언젠가 국토종단을 해봐야지’라고 다짐했던 생각이 떠올랐고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떠나볼까?’하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원자의 작은 엇나감이 지구형성의 단초(端初)라던 클리나멘의 이야기는 나에게도 이와 같은 변화를 낳았다.
하지만 결정은 여전히 못 내리고 있었다. 올해 꼭 임용에 붙고 싶었고 돈이 필요해 학원 강사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걸 잠시 멈춰야 한다니 이래저래 피해가 클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두 번째 인연이 있었다. 바로 박현아다. 나보다 더 진취적인 그 친구와 무슨 얘길 하는 도중에 ‘뭐든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해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랐다.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 녀석의 한마디는 나에게 더 밀고 들어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런 후에 국토종단을 해야겠다고 맘을 굳혔다.
하지만 아직 김유정 원장 선생님에게 말하기 전이었다. 거기서 최종 승낙이 나야만 나도 홀가분하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마조마하며 말했더니, 나보다 오히려 더 좋아하며 정말 잘 결정했다고, 시간만 맞으면 같이 걷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 반응을 대하고 나니 어찌나 행복하던지. 그런 세 인연들로 나의 계획도 탄력을 받았으며 지금껏 그저 의식 속에서 계획만 하고 있던 이 일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황석영씨의 『개밥바라기별』에서 나오는 막노동 아저씨는 '살아있음이란, 그 자체로 생생한 기쁨이다'라고 말했었다. 이젠 그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이 이토록 흥미진진하며 생동감 넘쳐흐르는 줄 이제야 알겠으니 말이다. 왜 그동안 답답해하고 생기 없이 살았는지, 이제야 후회가 된다. 그래도 괜찮다. 그런 슬픔의 터널을 지나온 탓에 지금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거니까.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살아 있어줘서 내 자신에게 정말로 고맙다'라고.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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