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Utilitarianism
한계효용(限界效用)이라는 말이 있다. 1만 원으로 자장면 세 그릇을 사 먹는다면 한계효용이 점차 체감하게 되므로 그 대신 탕수육을 시켜 먹든가, 영화를 보고 햄버거를 사 먹든가, 음반을 사든가 하는 등의 소비 방식으로 최대 효용을 추구한다는 뜻을 담은 개념이다. 19세기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로, 그 근저에는 만족도를 지수화해서 비교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쾌락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18세기 영국의 철학자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 먼저다. 그가 주창한 공리주의는 모든 인간이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안중근(安重根, 1879~1910) 같은 사람은 애초부터 공리주의에서 배제된다. 그런 얄팍한 공리주의가 다수결의 원칙으로 이어져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이 되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의심케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한계다.
물론 “옳고 그름의 척도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도덕과 입법의 원리 입문』”이라는 벤담의 모토에 따르면 안중근의 행위도 설명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안중근이 자신을 희생한 행위는 한민족이라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였다고 보면 되니까. 그러나 안중근이 만약 다수의 행복 이전에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나라를 먼저 생각했다면 어떨까? 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추상적인 민족과 대의명분을 우선했을 경우에도 그의 행위를 벤담의 공리주의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핵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완벽한 작품을 남기려고 매달린 화가의 예술혼을 단지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의도로 환원할 수 있을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절대적 진리로 굳게 믿은 벤담은 쾌락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척도로 만들기 위해 일곱 가지 범주를 정했다.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쾌락을 얼마나 빨리 느끼는가), 생산성(다른 쾌락을 얼마나 많이 낳을 수 있는가), 순수성(고통을 얼마나 덜 수반하는가), 연장성(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가)이 그 범주들인데, 말하자면 쾌락 성적표를 산출하기 위한 기준인 셈이다.
쾌락과 행복이 지수로 표현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치가나 행정가는 정책 결정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으니까 대환영일 것이다. 그러나 벤담의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범주에서 보듯이 본질상 주관적인 요소를 객관화하려고 하면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이다. 벤담의 사상을 전수 받았고 벤담처럼 자유주의 철학자였던 밀(John Stuart Mill, 1806~1873)도 그런 문제점을 깨닫고 그 조잡한 공리주의를 개선하고자 했다.
밀은 무조건 다수의 행복을 중시할 경우 이른바 ‘고급문화’가 설 지평이 사라진다는 점을 우려했다. TV를 보는 일반 국민들에게 국가대표 축구 중계와 한국의 전통가옥을 소개하는 교양 프로그램 중에서 선택하라면 다수결 표결의 결과는 뻔하다.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더 바람직스럽고 가치 있는 쾌락이 있다. -『공리주의』”고 믿은 밀은 벤담처럼 쾌락을 양적으로만 측정할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측정해야 한다고 보았다(쾌락을 측정할 수 있다고 본 점에서는 두 사람이 같다),
밀이 생각한 대안은 고급문화를 판단할 전문가 집단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 전문가 집단 역시 주관적인 견해를 가질 가능성이 많은 데다가 자칫하면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 결국 공리주의는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나 결함이 많은 사상이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의 천박한 논리에 잘 영합한 탓에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살아남았다. 오늘날에도 민주주의 선거에는 무차별적인 다수결 원칙이 적용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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