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체 형식을 부단히 재조정하다
앞에서 이미 읽어보았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어떻게 해서 수영을 그리도 귀신처럼 잘하게 되었는가[吾以子爲鬼, 察子則人也. 請問: 蹈水有道乎]?”라는 공자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 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타자를 고려하는 지행합일에 대한 명확한 사례를 얻게 된다. 급류를 수영하다보면, 나는 자신을 빨아들이는 물의 흐름[齊]을 만날 수도 있고 또 자신을 밀어내는 물의 흐름[汩]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수영을 잘 한다면 나는 그런 단독적인 물의 흐름에 부합되게 수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다양하고 단독적인 물의 흐름들과 더불어[與] 나는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물 바깥으로 밀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러저러하게 수영하겠다는 의지나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의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흐름들을 긍정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긍정으로부터 나의 움직임은 부단히 재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의 길[水之道]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 표현은 마치 물에는 수영을 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길이 사전에 미리 내재해 있다는 식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의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물과 더불어 소통해서 생기는 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물과 나의 소통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의 길은 물의 흐름만을 의미하는 것도 또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물의 길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물과 훌륭하게 소통한 뒤에만 드러날 수 있는 것, 또 이렇게 수영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만이 사후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영을 잘 하는 사람도 공자에게 자신은 그런 “물의 길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不爲私].”고 말했던 것이다.
어떻게 물의 길을 사사롭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와 물의 만남과 조우 그리고 소통으로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없었다면 물의 길은 존재할 수도 없었고, 또 마찬가지로 내가 없었어도 물의 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물이 있고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내가 물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물의 길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물의 길이란 결국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소통해서 수영을 완수했을 때에만 드러나는 무엇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결국 물의 길이 드러났다는 것은 수영을 하는 사람이 이제 능숙하게 수영을 하게 된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주체가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자에 맞게 자신의 주체 형식을 부단히 재조정해서 변형시킨 것 자체가 바로 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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