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수양과 삶의 통일
그러므로 이것이라고 여기는[爲是] 사변적 인식은 가로로 누워 있는 작은 기둥과 세로로 서 있는 큰 기둥, 추한 사람과 ‘서시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 등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도는 소통되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완전함도 있고, 완전함이 있으면 불완전함도 있다.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詭憰怪,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타자에 대해 내가 규정한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없어져야, 그 타자는 나와 다시 소통해서 하나일 수 있게 된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소통해서 하나가 될 줄 안다.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적인 것에 깃들도록 한다. 일상적인 것[庸]이란 씀을 말하고, 씀[用]이란 소통을 말한다. 그런데 소통[通]이란 바로 (나와 타자가 마땅한 자리를) 얻음이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지극해진 것이다. 사태에 따라 판단했을[因是]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道)라고 한다.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惟達者知通爲一, 爲是不用而寓諸庸. 庸也者, 用也; 用也者, 通也; 通也者, 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謂之道.
마음을 수고롭게 해서 하나[一]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 같음[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고 한다. 아침에 셋이란 무슨 뜻인가?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라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라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그 원숭이 키우는 사람도) 있는 그대로에 따라 판단했을 따름[因是]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타자와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이라고 한다.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 謂之 “朝三”. 何謂 “朝三”? 狙公賦芧, 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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