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년 동안 익힌 기술이 머뭇거려지는 순간
서양 연구자들은 ‘포정 이야기’를 포함한 『장자』 도처에 나오는 ‘장인 이야기들’에 많은 관심을 피력하고 있다. 그들의 장자 연구는 know-how와 know-that의 구별, 즉 실천적 앎과 이론적 앎의 구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실천적 얇은 이론적 앎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실천적 앞에서 이론적 앎은 도출될 수 있지만, 이론적 앎에서 실천적 앎은 도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두 바퀴로 되어 있고 페달을 밟아서 가는 운송수단임을 아는 것(=이론적 앎)이 필연적으로 자전거를 실제로 탈 수 있다는 것(=실천적 앎)을 함축하지는 않지만, 자전거를 실제로 탈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전거가 이러저러한 운송수단임을 안다는 것을 함축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 따라 그들은 장인들 이야기를 강조하면서, 장자가 실천적 삶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회의주의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분명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만, 그들은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포정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장자는 결코 실천적 삶 자체를 맹목적으로 옹호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문혜군이 포정이 소 잡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면서 기술[技]이 훌륭하다고 말하자, 포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탁월한 도[道]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는 기술보다 탁월한 것이라는 포정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데 문제는 포정이 문혜군에게 이야기해준 소 잡는 방법은 표면적으로는 분명 숙련된 기술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소 잡는 기술은 분명 ‘~할 수 있는 방법(know-how)’을 의미하는 실천적 앎의 한 가지 사례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포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발제 원문에는 기술보다 도가 우월해질[進] 수밖에 없는 지점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만 한다. 그 부분은 어디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포정의 술회에 있다. “비록 그렇게 제가 소통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는 매번 살과 뼈가 엉켜 있는 곳에 이르러 그 자르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소를 19년 동안 잡으면서 익혔던 기술이 도대체 적용되지 않는 지점을 포정은 매번 소를 자를 때마다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약 포정이 19년 동안 익혔던 기술을 믿고 매번 조우할 수밖에 없는 자르기 힘든 곳을 자르려고 한다면, 그의 칼은 이미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19년 동안 소를 잡으면서 익혔던 기술은 「제물론(齊物論)」 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은 이룸[小成]에 불과했던 것이다. 특정한 기술은 분명 타자와의 소통의 흔적이지만, 이것으로 모든 타자와 소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예를 들어 소를 잘 잡는 사람이 수영을 잘 할 수 없듯이,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소를 잘 잡을 수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포정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유지하면서 타자에 맞게 자신의 기술을 재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포정이 말한 도는, 기술이란 것이 단지 특정한 타자와의 소통의 결과로 출현한 특정한 흔적이기 때문에 다른 타자와 만났을 때에는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통찰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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