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타자와의 소통은 목숨을 건 비약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장자의 전언의 취지는 우리가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하게 되면 저절로 타자와 소통하게 된다는 데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부분 ㉯에서 장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려는 이야기, 즉 무매개적 소통을 기술하려고 한다. 분명 ㉮부분에 따르면 안연은 이제 소통의 가능성으로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셈이다. 그런데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는 이제 비인칭적인 마음을 가지고 안연이 어떻게 타자와 소통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되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구나(盡矣, 吾語若)!” 놀랍게도 장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이 해소되고 완결되었다면 장자의 이어지는 이야기는 무의미한 이야기이거나 쓸데없는 사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분석한 것처럼 비인칭적인 마음이란 매개 없이 타자와 직면할 수 있는 일종의 준비 상태이지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 마음이 결코 아니다. 단지 비인칭적인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 초자아나 관념에 의해 매개된 대상, 즉 풍경으로서의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한 나, 고착된 자의식을 제거한 단독적인 내는 타자와 다시 새롭게 직면하게 된다. 공자의 입을 빌린 장자에 따르면 안연은 이제 타자와 조우해서 그 타자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면 말하고 듣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여기서 포정이 매번 살과 뼈가 엉킨 곳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경우 포정은 더욱더 자신의 소통 역량을 극대화해야만 했다. 여기에서도 장자는 마찬가지로 말한다. “너의 마음을 더욱 전일하게 해서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음[不得已=타자의 타자성]에 깃들어라[一宅而寓於不得已].” 오직 자신의 비인칭적인 마음이 지닌 소통 역량으로 타자에 과감히 뛰어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사태를 매개했던 초자아나 과거의식에 고착된 자의식이라는 안온한 완충장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자는 ‘문도 없고 언덕도 없다[無門無毒]’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문과 언덕은 모두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미리 설정된 매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런 나와 타자와의 직대면과 소통이 신비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공자의 입을 빌려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날개가 있어 난다는 것을 들어보았지만, 날개 없음으로써 난다는 것을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는 인식이 있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들어보았지만, 인식이 없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聞以有翼飛者矣, 未聞以無翼飛者也; 聞以有知知者矣, 未聞以無知知者也].” 여기서 날개 없음[無翼]과 인식이 없음[無知]은 매개가 없다는 것, 초자아가 제거되었다는 것, 따라서 비인칭적인 마음을 회복했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마음이 지닌 소통 역량, 다름아닌 신(神)과 기(氣)의 역량 때문이다. 장자는 자신의 이런 발견이 일상인들에게 낯설게 보일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식인들에게 지식을 버리라는 것이다. 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변론가들에게 언어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새에게 날개를 버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자가 권하는 타자와의 소통은 이처럼 편안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히려 그것은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에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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