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미가 먼저이고 주체와 대상은 이후에 구성되는 결과물이다
우리는 보통 대상과 의미를 혼동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대상은 사물 자체에 의미가 덧붙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물 자체는 우리가 관념 속에서 어떤 대상으로부터 그것에 부여된 의미를 억지로 빼어냈을 때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순수한 관념의 대상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체의 의미를 결여하고 있는 사물 자체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경험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체의 대상은 모두 의미를 부여받은 것으로 경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의 경험은 우리 자신이 이미 부여한 의미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놀이 공간으로서의 돌덩이에서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를 빼는 순간, 우리에게 무엇이 경험되겠는가? ‘무의미’가 경험된다. 이 말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무의미란 무경험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무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무의미의 경험은 새로운 의미 생산의 가능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않는 돌덩이는 사물 자체의 좋은 예일 수 있다. 이것에 놀이 공간이라고 의미가 부여되면, 우리는 아이가 되고 돌덩이는 놀이 공간이 된다. 그러나 이것에 고인돌이라는 의미가 부여되면, 우리는 어른이 되고 돌덩이는 선사시대의 유물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대상을 그것에 원래 의미가 내재해 있는 것처럼 경험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대상은 의미부여의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자신들도 의미의 결과물이라고 해야 한다.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가 놀이 주체를 아이로, 사물 자체를 놀이 공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고인돌이라는 의미가 주체를 어른으로, 사물 자체를 선사시대의 유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의미가 먼저이고 주체와 대상은 이로부터 구성되는 결과물이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하면, 타인은 연인이 되고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타인에게 사랑받을 만한 본성이 미리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며 나에게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이라는 의미가 발생한 후, 주체나 타자에게 그 의미를 확인하기 때문에 생기는 환상일 뿐이다.
고인돌이라는 의미가 부여된 대상은 이미 어른으로서의 나와 동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고인돌이 선사시대에 있었다는 의미 부여는 이미 사회적 어른으로서의 내가 역사시대에 살고 있다는 의미 부여와 동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체와 사물 자체 사이에 의미가 발생하게 되면 주체는 특정한 주체(=의미 부여된 주체)로, 사물 자체는 특정한 대상(=의미 부여된 대상)으로 생산된다. 놀이 공간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게 되면, 주체는 노는 아이로 사물 자체는 노는 장소로 현상하게 된다. 반면 고인돌 혹은 선사시대의 유물이라는 의미가 발생하게 되면, 주체는 유물을 관람하는 어른으로 사물 자체는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현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추론이 옳다면, 우리는 새로운 주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새로운 주체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의미 부여가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새로운 의미 부여가 단순히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정도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새로운 주체는 제대로 만들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정도의 의미는 단지 현존하는 주체의 공허한 상상에 불과한 것이고, 따라서 주체는 여전히 기존의 고정된 의미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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