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유가(儒家)의 시편(詩篇)
조선조에 이르러 주자학(朱子學)이 정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일정한 문학관념을 성립시켰으며 이것이 문학발전을 저해하는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100여년간은 주자학이 사림(士林)의 속상(俗尙)으로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서거정(徐居正)ㆍ김종직(金宗直) 등이 앞장서서 효용론적(效用論的)인 문학관(文學觀)을 큰소리로 외쳤지만, 이들은 모두 조선초기 시단(詩壇)의 토대를 구축한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의 선구들에 있어서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설리성(說理性)이 강한 시풍(詩風)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자연의 흥취를 통해 순수한 성정(性情)을 표출하는 시풍(詩風)을 보이기까지 한다.
서경덕(徐敬德, 1489 성종20~1546 명종1, 자 可久, 호 花潭ㆍ復齋)은 일생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격물(格物)에만 전심(專心)한 학자이다.
산수를 유람하는 일 외에는 손수 엮은 초막에 들어 앉아 격물(格物)에 힘써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수립하였다. 그가 남긴 산문은 「태허설(太虛說)」, 「원리기(原理氣)」,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자신이 궁구하여 터득한 것을 담은 논변류(論辨類)가 대부분이며 작시(作詩) 태도 또한 시(詩)의 문학적(文學的) 미감(美感)보다는 자득(自得)의 리(理)를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시(詩)로 옮기고 있다.
그의 시는 『화담선생문집(花潭先生文集)』 「유사(遺事)」 卷3 17a를 보면 ‘화담의 강학은 오로지 주희와 소옹을 종주로 삼았고 시 또한 소옹의 문집인 『격양집(擊壤集)』을 본받았다[花潭講學, 專以周邵爲宗, 詩亦效法擊壤].’라고 하여 북송(北宋)의 도학가인 소옹(邵雍)에게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서경덕(徐敬德)과 소옹(邵雍)의 관계는 원인손(元仁孫)과 윤숙(尹塾)의 서(序)에서도 밝혀져 있다】, 소옹(邵雍)의 관물론(觀物論)을 연상케 하는 「유물(有物)」은 다음과 같다.
有物來來不盡來 | 사물은 오고 또 와도 다 오지는 못하고 |
來纔盡處又從來 | 다 왔다가도 또 다시 오는 법, |
來來本自來無始 | 오고 또 와도 본디 오는 것은 처음이 없으니 |
爲問君初何所來 | 묻노니 그대의 시초는 어디에서 왔는가? |
서경덕(徐敬德)은 남긴 시편도 많지 않거니와, 현전하는 시는 대부분 철학적 이치를 담담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서경덕(徐敬德)은 그의 「원리기(原理氣)」에서 ‘太虛湛然無形, 號之曰先天, 其大無外, 其先無始, 其來不可究. 其湛然虛靜, 氣之原也.’라 했고 「리기설(理氣說)」에서 ‘無外曰太虛, 無始者曰氣, 虛卽氣也, 虛本無窮, 氣亦無窮.’라 했으며 「태허설(太虛說)」에서 ‘氣無始也, 無生也, 氣無始何所終, 氣無生何所滅?’라 하며 보여준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은 비록 그것이 주자학(朱子學)의 정통(正統)으로 용납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유물(有物)」 역시 그의 氣哲學만 확인하고 있을 뿐 시(詩)로써 갖추어야 할 것은 전혀 돌보지 않은 칠언사구(七言四句)의 파격(破格)일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상수학적(象數學的)인 그의 관심을 유희적으로 읊조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도 한다. 그러나 조욱(趙昱)과 같이 사상적으로 순정한 주자학에 몰두한 초기의 학자까지도 시작(詩作)의 방식을 소옹(邵雍)과 그를 이은 서경덕(徐敬德)에게서 구하고 있음은 주목할 일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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