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朴淳)의 뒤를 이어 우리 시단에 당시(唐詩)의 풍기(風氣)를 널리 보급하는데 큰 공을 보인 작가는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달(李達) 세 사람이다.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통칭한 첫 기록은 임상원(林相元)의 「손곡집서(蓀谷集序)이다. “선조 연간에 이르러 『상당집(三唐集)』이라 불리는 것이 있었는데,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ㆍ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이른다. 이 세 사람은 힘써 당을 모의하여 간혹 아주 비슷한 것이 있다[當穆陵朝, 有稱三唐集者, 崔孤竹慶昌ㆍ白玉峯光勳ㆍ李蓀谷達也. 是三子者, 刻意摹唐, 間有他相肖者]”라 한 것이다.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합칭(合稱)하여 부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파악하는 흐름은 허균(許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융경(隆慶, 1567~1572),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ㆍ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이 비로소 개원(開元) 연간(713~741, 곧 盛唐 시기)의 시를 배우고 정화를 이루기에 힘써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였으나 뼈대가 완전하지 않고 수식이 너무 지나쳐 허혼(許渾)과 이교(李嶠)의 사이에 두더라도 곧 촌뜨기의 꼴임을 깨닫게 되니 어찌 이백(李白)과 왕유(王維)의 위치를 앗을 수 있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이로부터 학자들이 당풍(唐風)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세 사람의 공을 또한 덮어 둘 수는 없다[隆慶萬曆間, 崔嘉運白彰卿李益之輩, 始政開元之學, 黽勉精華, 欲逮古人. 然骨格不完, 綺靡太甚, 置諸許李間, 便覺傖夫面目, 乃欲使之奪李白摩話位耶? 雖然, 由是學者知有唐風, 則三人之功, 亦不可掩矣].”고 한 것이 허균(許筠)의 말이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연장(年長)이면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는 최경창(崔慶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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