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당파(唐派)의 광망(光芒)
고려조(高麗朝) 시학(詩學)이 융성해지면서 우리 소단(騷壇)은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송시학(宋詩學)의 압도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그 발전을 이룩해왔다.
선초(鮮初)에 두시(杜詩)를 언해(諺解)한 이래 간헐적으로 이어진 학당(學唐)의 흐름은 조선중기 목릉성세(穆陵盛世)에 들어 비로소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127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시인이 송나라와 원나라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않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주와 유호인과 신종호와 신광한은 당풍에 가깝다 일컬어지지만 깊이 나아가는 공력이 없는 듯하다. 박순과 최경창과 백광훈과 이순인과 이달은 모두 당풍을 배웠으니 지은 시가 칭송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다만 절구가 오언율시에 그쳐 칠언율시 이상의 장편시는 좋을 수 없고 또한 성당에 이르지 못했다. 이것은 재주와 학문의 연원이 본래 미천해서 그런 것인데 잘 모르는 이들은 당풍을 배운 잘못이라 여기니 가소롭기만 하다.
本朝詩人, 不脫宋元習者無幾. 如李冑ㆍ兪好仁ㆍ申從濩ㆍ申光漢號近唐, 而似無深造之功. 朴淳ㆍ崔慶昌ㆍ白光勳ㆍ李純仁ㆍ李達, 皆學唐, 其所爲詩有可稱誦者. 但止於絶句或五言律, 而七言律以上則不能佳, 又不能進於盛唐. 是其才學淵源本小而然, 不知者以爲學唐之咎可笑.
조선의 시인들이 대부분 송(宋)과 원(元)의 영향 아래 있을 때 이주(李胄)ㆍ유호인(兪好仁)ㆍ신종호(申從濩)ㆍ신광한(申光漢) 등이 겨우 당시(唐詩)와 비슷한 시를 제작했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못하였다 하고, 당시(唐詩)를 제대로 배운 시인으로 박순(朴淳)ㆍ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이순인(李純仁)ㆍ이달(李達) 등을 들었다. 이수광(李睟光)의 이 발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학송(學宋) 일변도의 소단(騷壇) 분위기를 학당(學唐)으로 바꾸어놓은 선구자로는 박순(朴淳)이 첫손에 꼽힌다.
박순(朴淳, 1523 중종18~1589 선조22, 자 和叔, 호 思庵)은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14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당시(唐詩)를 모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여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시인이다.
박순(朴淳)이 삼당시인(三唐詩人)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이달(李達)에게 학당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준 장면이 허균(許筠)의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에 그려져 있다. 박정승은 이달(李達)에게 ‘시의 길은 마땅히 당(唐)을 정도(正道)로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지만 이미 이류로 떨어졌다[詩道當以爲唐爲正, 子瞻雖豪放, 已落第二義也]’고 말하고 시렁 위에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와 가음(歌吟),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를 꺼내어 주었더니 이달(李達)은 깜짝 놀라며 바른 법도가 이에 있음을 알아 마침내 옛날 배웠던 것을 모두 버렸다는 것이다.
학시(學詩)에 대한 견해가 그러할 뿐 아니라 그의 시 또한 당시(唐詩)에 근접하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후대의 신흠(申欽)은 『청창연담(晴窓軟談)』 권하 45에서 그가 당시(唐詩)를 익혀 시풍이 ‘청소(淸邵)’하다고 고평을 보냈다[至於得正覺者, 猶不多, 思庵朴公淳, 近來稍涉唐派爲詩, 甚淸邵].
그의 시(詩)로는 「방조처사산거(訪曹處士山居)」(七絶), 「사은후귀영평(謝恩後歸永平)」(七絶), 「여산군별행사상인(礪山郡別行思上人)」(七絶), 「제양총병묘(題楊總兵廟)」(七絶)」, 「청풍한벽루(淸風寒碧樓)」(七絶)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박순(朴淳)의 시명(詩名)을 가장 떨치게 한 작품으로는 「방조처사산거(訪曹處士山居)」를 꼽을 수 있다.
醉睡仙家覺後疑 | 선경에서 잠들었나 깨고나서 의심했는데, |
白雲平壑月沈時 | 구름 덮인 산골짜기에 달이 질 때로다. |
翛然獨出脩林外 | 재빨리 호올로 긴 숲 밖으로 나가니, |
石逕筇音宿鳥知 |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던 새가 아는구나. |
원제는 「방조운백(訪曺雲伯)」으로 백운동(白雲洞)에 은거하고 있는 조준용(曺俊龍, 字 雲伯)을 찾아가 쓴 작품이다. 신선의 집과 같은 친구의 은거지에서 새벽에 잠이 깨어 홀로 지팡이를 짚고 나서니 자던 새가 그 소리에 놀라 깨는 정경을 한 폭의 수채화같이 맑은 필치로 그리고 있다.
결구(結句)의 ‘숙조지(宿鳥知)’가 하도 유명해 박순(朴淳)의 별명이 ‘숙조지선생(宿鳥知先生)’으로 되었으며, 후대의 시화집(詩話集)에 자주 화제가 될 정도로 이름난 작품이다【『호곡시화(壺谷詩話)』 3과 『지봉유설(芝峰類說)』 동시126 참조】.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20에서 박순(朴淳)의 시세계에 속기(俗氣)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백광훈) (0) | 2021.12.21 |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4. 당파의 광망(최경창)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3. 도선가의 명작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2. 이학자의 여기(성혼&정구)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2. 이학자의 여기(이이&송익필)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