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林悌, 1549 명종4~1587 선조20, 자 子順, 호 白湖)는 무변 집안의 자손으로 세상 일에 얽매이거나 남들과 무리짓기를 꺼려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하였으나, 뛰어난 시재(詩才)와 독특한 제재로써 이룩한 그의 시세계는 분명히 범상(凡常)을 뛰어넘고 있다.
특히 그의 시작(詩作)에는 변새시(邊塞詩)와 염정시(艷情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니와 호방(豪放)한 기상과 섬농(纖穠)한 기교를 공유하고 있는 그의 시세계는 남다른 풍격을 형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시세계의 특질은 그의 무인적 기질과 출사(出仕)의 불우함, 만당시인(晩唐詩人) 두목(杜牧)의 영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임제(林悌)는 출사(出仕)가 불우하여 주로 변방지방의 관리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변새의 풍물과 지방의 형승을 호방한 필치로 시화하고 있다. 특히 그의 스승이자 지기(知己)인 성혼(成運)ㆍ박계현(朴啓賢) 등의 죽음은 그에게 벼슬길에 염증을 느끼게 하고 유랑을 강요하여 그로 하여금 많은 변새시와 기행시를 짓게 한 것으로 보인다.
임제시(林悌詩)에 끼친 두목(杜牧)의 영향 관계는 이항복(李恒福)ㆍ이달(李達)ㆍ신흠(申欽)ㆍ양경우(梁慶遇) 등이 “임제는 시어(詩語)가 매우 염려하니 대개 두목(杜牧)을 배운 사람[語甚艷麗, 盖學樊川者也. 『청창연담(晴窓軟談)』 26 / 林正郞白湖悌爲詩學樊川, 多重一世 『霽湖詩話』]”이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거니와 임제(林悌) 스스로 종제(從弟)인 임서(林㥠)에게 “당의 시인 중에서 맹호연과 두목이 제일류가 된다[唐之詩人, 孟浩杜牧爲第一流]”라 하여 스스로 두목시(杜牧詩)를 좋아한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규원(閨怨)」(五絶), 「무제이수(無題二首)」(七絶), 「패강가(浿江歌)」(七絶), 「고산역(高山驛)」(七絶), 「송경성황판관찬(送鏡城黃判官璨)」(七絶), 「중화도상(中和道上)」(五律), 「송북평사이형(送北評事李瑩)」(五排) 등이 알려진 작품들이며, 이 중에서도 「고산역(高山驛)」과 「송경성황판관찬(送鏡城黃判官璨)」, 「원수대(元帥臺)」 등은 그의 호기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고산역(高山驛)」을 먼저 보인다.
胡虜曾窺二十州 | 오랑캐 일찍이 스무 고을 엿보자 |
將軍躍馬取封侯 | 장군이 말을 달려 제후에 봉해졌네. |
如今絶塞無征戰 | 금일처럼 먼 변방에 싸움이 없다면 |
壯士閑眠古驛樓 | 장사들이 옛역루에서 한가로이 잠자리라. |
말을 한 번 내달려 변방을 엿보는 오랑캐들을 무찌른 장군의 뛰어난 지략과 호방한 기세를 실감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임제(林悌)의 명편(名篇) 가운데서도 여러 편의 「무제(無題)」 시(詩)와 「패강가(浿江歌)」 십수(十首), 「무어별(無語別)」 등은 섬농(纖穠)한 그의 시세계를 알게 해주는 대표작이 되고 있다. 그 가운데 「무어별(無語別)」을 보면 다음과 같다.
十五越溪女 羞人無語別 |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남볼까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헤어지네. |
歸來掩重門 泣向梨花月 | 돌아와 겹겹이 문을 걸어 잠그고 달빛 어린 배꽃 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네. |
이 시는 회화적인 기법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세계의 비밀을 담담히 드러내고 있다. 후대인들이 「규원(閨怨)」이란 제목을 「무어별(無語別)」로 바꾸어놓을 만큼 ‘수인무어별(羞人無語別)’의 섬교한 기교는 일품(逸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편을 한 줄에 꿰맨 듯한 구성의 묘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 원리를 뛰어넘어 규방 아가씨의 서툴고도 서러운 사랑의 정감을 드러내 보이기에 적절한 수법이다. 행여나 남이 볼까 부끄러워 말도 못한 채 돌아서는 아가씨의 서러운 사랑은 ‘겹겹이 문을 걸어 잠그고’ ‘달빛 어린 배꽃’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열다섯 살 아가씨의 형상화를 통하여 전통시대 규방의 원망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당시(全唐詩)』에 실려있는 당대(唐代) 무명씨(無名氏)의 것이라는 설도 있어 그 진위는 가려져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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