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문장가(文章家)의 시작(詩作)
최립(崔岦)의 문(文)과 권필(權韠)의 시(詩)는 나란히 일세(一世)에 이름을 드날렸거니와, 특히 의고문(擬古文)을 숭상한 최립(崔岦)은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너무 높아 그의 시작(詩作)은 문명(文名)에 가리어 빛을 발하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고문(古文)을 시범(示範)한 월상계택(月象谿澤) 또는 계택상월(谿澤象月)로 불리우는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역시 그들의 시작(詩作)이 문명(文名)에 가리어 후세의 관심에서 소원(疎遠)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립(崔岦, 1535 중종30~1612 광해군4, 자 立之, 호 簡易ㆍ東皐)은 문장에 조예를 보여 월상계택(月象谿澤)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와 비견되기도 하였다.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여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특히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明)에 가서 왕세정(王世貞) 등과 문장을 논하여 그곳의 학자들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으며, 왕세정 등 고문에 전심한 문인들로부터 ‘고아간결(古雅簡潔)’하며 법도에 맞는다는 칭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고문체(擬古文體)는 선진문(先秦文)을 극도로 추승하여 고문의 평이성을 거부하고 험벽(險僻)하게 억지 모방을 일삼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문장,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최립(崔岦)은 시(詩)보다는 문장(文章)으로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시도 기건(奇健)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김창협(金昌協)은 최립(崔岦)의 시를 평가하여 소식(蘇軾)과 강서시파(江西詩派)인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 등의 시를 배워 풍격이 호횡(豪橫)하고 성향(聲響)이 굳세어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소리같다고 하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 시평114에선 “간이 최립은 시에 후산을 몹시 좋아하여 항상 시는 모름지기 용의(用意)로써 공교로움을 삼아야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는 의미가 없어 좋은 작품이 없다라고 말했다[崔簡易岦於詩酷好后山 常言詩須以用意爲工 我國人詩無意味 所以未善也]”고 동방의 시를 품평하였다. 이 말은 그의 시가 소황(蘇黃)의 유풍(遺風)을 계승하여 시어의 정절(精切)함과 기상의 교건(矯健)함에 힘쓰는 등 시의 정련(精鍊)에 치중하였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래서 “최립(崔岦)의 어의(語意)는 회회(晦晦)하여 또한 구속됨을 면하지 못하였다[語意似晦 而且未免拘牽].”고 평가하였다.
최립(崔岦)의 「삼월삼일등망경루요양성(三月三日登望京樓遼陽城)」은 최립(崔岦)의 침건(沈健)한 기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城上高樓勢若騫 | 성 위의 높은 누각 날 듯한 기세라, |
危梯一踏一驚魂 | 사다리 한 번 밟자 혼이 한 번 놀라네. |
遙空自盡無山地 | 아득한 허공은 산 없는 평원에 절로 다하고 |
淡靄多生有樹村 | 맑은 아지랑이 나무 있는 마을에 많이 피어 난다. |
北極長安知客路 | 북극의 장안은 나그네 길 알려주고 |
東風上已憶鄕園 | 삼짓날 봄바람은 고향 동산 생각케 하네. |
閑愁萬緖那禁得 | 한가한 시름 만 가닥 어찌 막으리? |
料理斜陽酒一樽 | 해질녘에 술 한잔 마시고파라. |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삼월삼일등망경루(三月三日登望京樓)」라는 제명으로 선발되어 있다. 망경루는 중국 요양현에 있는 누대 이름이다. 간이는 1577년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 왔는데 이 시는 그 사행(使行) 때 쓴 것이다. 물경(物境)에서 촉발된 향수(鄕愁)를 잘 그려낸 시이다. 함련(頷聯) 하구(下句)의 ‘담애다생유수촌(淡靄多生有樹村)’에서 특히 ‘유수촌(有樹村)’이 이 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산지(山地)가 없는 평원(平原)에 ‘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정절(精切)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허균(許筠)은 이정(李楨)이 정아판(鄭亞判)을 호종하여 연경에 사행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쓴 「송이정종정아판부경(送李楨從鄭亞判赴京)」이라는 오언고시는 최립(崔岦)의 웅혼기굴(雄渾奇崛)한 기상이 잘 드러난 시라고 평가하였다.
文殊路已十年迷 | 문수로를 이미 십년 동안 헤매여 |
有夢猶尋北郭西 | 꿈에도 북곽 서쪽을 찾는다네. |
萬壑倚筇雲遠近 | 만 골을 지팡이 짚고 가니 구름은 원근에서 일고 |
千峯開戶月高低 | 천 봉우리 문을 열어 달빛이 일렁이네. |
磬殘石竇晨泉滴 | 경쇠소리 돌구멍에 잦아들고 새벽 샘물 방울 듣는데 |
燈剪松風夜鹿啼 | 등불은 솔바람에 흔들리고 밤사슴 울음 우네. |
此況共僧那再得 | 이런 정황을 중과 함께 어찌 다시 얻으리오? |
官街七月困泥蹄 | 관가의 칠월 진창에서 말이 고생하네. |
위의 시는 문수(文殊)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를 차운한 「차운문수승권(次韻文殊僧卷)」이다. 문수승의 행적은 살필 수 없으나 이 시를 통하여 최립(崔岦)과 상당한 친교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오랜만에 문수승을 찾은 감회를 저력있게 묘파하고 있어 기굴한 그의 기상을 한 눈으로 읽을 수 있다.
인용
'책 > 한시(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6. 문장가의 시작(이정구) (0) | 2021.12.21 |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6. 문장가의 시작(신흠)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5. 문필가의 시세계(허균)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5. 문필가의 시세계(이수광) (0) | 2021.12.21 |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5. 문필가의 시세계(유몽인)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