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신문(皇城新聞)」은 1899년 11월부터 사조란을 두고 있으나 우국의 충정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는 학회의 활동범위를 기호지방으로 한정한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사림의 우국 시편은 거의 볼 수 없고 다만 김윤식의 친일(親日) 차운시(次韻詩)가 독판을 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많은 우국시를 발표하고 있는 것이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이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의 사조란은 우선 문예란으로서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고 있는 느낌이다. 선현들의 시작 가운데서도 명편을 골라 수록하고 있으며 당대 명사들의 작품도 다양하게 게재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물량에 비하여 우국시가 적은 것도 사실이며, 특히 시기적으로 을사늑약이 있은 다음 해인 1906년에서부터 회보가 발행되고 있기 때문에 민충정공(閔忠正公)과 최익현(崔益鉉)의 만사(輓詞)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익명으로 된 「독월남망국사유감(讀越南亡國史有感)」과 같은 장편을 싣고 있는 의지는 ‘사조(司藻)’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협회의 구성원으로 보면 자강회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지도층의 성향이 후일 대일협력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협회의 성격도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사조(司藻)’에서 과시한 우국의 의지는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것은 곧 지도부의 임원진과 구성원 사이에 개재하는 심한 괴리현상을 사실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창작시에 못지 않게 전시대의 시작을 재현하는 데 관심을 보여 선인들의 시편 가운데서 경세(警世)의 목적에 걸맞는 작품을 대량으로 게재하고 있다.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독송사(讀宋史)」를 비롯하여, 어무적(魚無迹)의 「유민탄(流民歎)」, 권필(權韠)의 「투구행(鬪狗行)」, 임제(林悌)의 「고산역(高山驛)」, 정지윤(鄭芝潤)의 「관왕묘(關王廟)」와 같은 문제작이 눈길을 끌고 있으며, 특히 김종직(金宗直)의 「동도악부(東都樂府)」와 정도전(鄭道傳)의 「오호도전횡(嗚呼島田橫)」을 수록하고 있는 것은 더욱 시사적이다. 「동도악부(東都樂府)」의 치술령(鵄述嶺)은 바로 박제상(朴堤上)의 이야기이며 「오호도전횡(嗚呼島田橫)」은, 전횡과 그의 식객 500인이 함께 죽은 고사다. 의기가 상통하면 500의 무리도 함께 죽을 수 있었던 전범으로 널리 알려져온 이야기다.
「황성신문」 사조란에 기고한 하서자(荷西子) 지창한(池昌翰)의 우국시 「장충단유감(獎忠壇有感)」 한 수만 보인다.
萬死非難一死難 | 만 번 죽기는 어렵지 않지만 한 번 죽기가 더 어려운데 |
人臣大節亂時看 | 신하 된 자 절개는 난시에 보면 잘 알리라. |
吾輩偸生生亦恨 | 죽어야 할 때 못 죽는 인생 살아도 또한 한이니 |
秋風痛哭獎忠壇 | 추풍에 장충단에 가 목놓아 우니노라. 「황성신문」(縮刷版) 제3권 264호, |
시작의 솜씨는 진솔할 뿐이다. 죽어야 할 때인데도 죽지 못하고 거짓으로 도생(圖生)하는 인생의 비굴한 모습을 강개조로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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