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지에게 먹을 빌리며 부치다
기담지걸묵(寄湛之乞墨)
임춘(林椿)
吾窮正坐詩 袖手久已縮
오궁정좌시 수수구이축
但恐身後名 同腐草與木
단공신후명 동부초여목
晚學揚子雲 草玄在天祿
만학양자운 초현재천록
隃麋不見賜 未奏三千牘
유미불견사 미주삼천독
念昔家未破 嘗寶松煙馥
념석가미파 상보송연복
正患墨磨人 豈暇歎未足
정환묵마인 기가탄미족
如今篋笥貧 牢落無餘蓄
여금협사빈 뢰락무여축
君得東坡法 油煙收幾掬
군득동파법 유연수기국
歲月儻可支 分我一寸玉
세월당가지 분아일촌옥 『西河先生集』 卷第一
해석
吾窮正坐詩 袖手久已縮 | 내가 곤궁히 정자세로 앉아 시를 쓸 적에 소매 속 손은 오래되어 이미 수척해졌지. |
但恐身後名 同腐草與木 | 다만 걱정되는 건 사후에 이름이 초목과 함께 썩는 거라네. |
晚學揚子雲 草玄在天祿 | 느지막이 양자운을 배우려는데 초록한 『태현경』이 천록각에 있어 |
隃麋不見賜 未奏三千牘 | 먹【유미(隃麋): 중국의 현(縣) 이름으로, 먹의 산지로 유명한 곳인바, 전하여 먹을 가리킨다.】을 하사받지 못해 삼천장의 편지 아뢰지 못하네. |
念昔家未破 嘗寶松煙馥 | 옛집 파산하지 않았을 때 생각해보면 일찍이 먹【송연(松烟):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먹을 만드는 원료로 씀.】의 향기를 보배로 여겼네. |
正患墨磨人 豈暇歎未足 | 바로 먹 가는 사람이 걱정되니 어찌 한가롭게 넉넉지 못하다 탄식하랴. |
如今篋笥貧 牢落無餘蓄 | 지금 먹 상자가 비어 쓸쓸히 남은 비축량 없다네. |
君得東坡法 油煙收幾掬 | 그대는 동파의 먹 만드는 법 터득했으니 윤기 나는 먹을 가진 게 몇 움큼이려나? |
歲月儻可支 分我一寸玉 | 세월이 만약 지탱할 만하다면 나에게 한 마디의 먹 나눠주게나. 『西河先生集』 卷第一 |
해설
시는 이담지(李湛之)에게 한 자루의 먹을 빌리고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어떤 기교나 상징적 수법을 개입시키지 않고 진솔하게 써 내려가고 있어, 산문을 읽는 듯하다(그의 다른 시를 보면 對偶를 무시한다거나 虛字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시(詩)의 산문화(散文化) 경향은 당(唐)나라 한유(韓愈)나 유종원(柳宗元) 등의 고문복고(古文復古)를 주장한 고문가(古文家)들에게 나타났고 이후 당송(唐宋) 고문가들의 시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임춘 역시 ‘이문위시(以文爲詩)’라는 고문가들의 시관(詩觀)을 그대로 반영하여 이렇듯 산문화(散文化)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산문화(散文化) 경향을 전대 장옥문학(場屋文學)의 한 반발로 보기도 한다. 임춘은 전대의 문학을 장옥문학이라 규정하며 성률(聲律)과 대우(對偶) 중시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즉 성률에 의한 시의 음악화 현상과 대우(對偶)에 의한 유미적(唯美的) 조직화 현상을 기조로 한 형식주의 문학을 해체하여 작자중심의 문학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러한 산문화로의 전환은 장형화(長型化)와 함께 임춘에게 끝나지 않고 이규보(李奎報)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원주용, 『고려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09년, 131~132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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