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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1. 송시학의 수용, 1) 이인로와 죽고칠현의 등장(임춘)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송시학의 수용과 한국시의 발견 - 1. 송시학의 수용, 1) 이인로와 죽고칠현의 등장(임춘)

건방진방랑자 2021. 12. 20.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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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춘(林春, ?~?, 者之, 西河)정중부(鄭仲夫)의 난()에 탈신(脫身)하여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문명(文名)이 일세(一世)를 경동(驚動)케 했으나 세 번이나 과거(科擧)에 도전한 불운(不運)을 겪어야 했으며 30여세(餘歲)의 일생(一生)을 침울(沈鬱)하게 보냈다이인로(李仁老), 제임선생문(祭林先生文)」】.

 

그의 시문집(詩文集)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이인로(李仁老)에 의하여 간행되어 현재까지 전하고 있으므로 그를 알게 하는 자료(資料)로서는 충분하다. 특히 그는 수십 편에 이르는 서계(書啓)를 통하여 당시 사단(詞壇)의 속상(俗尙), 과거제도(科擧制度)의 폐해(弊害), 자신의 모든 것까지 직접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문(詩文)에 대한 비평(批評)은 조선초기 이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의 문집(文集)이 조선초기 이후 행방을 감추었다가 숙종(肅宗代)에 이르러 다시 나타나게 된 것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있는지 모른다.

 

그의 시문(詩文)에 대해서는 이인로(李仁老)서하집(西河集)의 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초기의 발언(發言)이다.

 

 

그의 시문(詩文)은 우리나라에서 포의(布衣)의 몸으로 세상에 내노라 하기로는 이 한 사람 뿐이다.

其詩文, 自海以東, 以布衣雄世者, 一人而已.

 

 

성현(成俔)용재총화(傭齋叢話)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인로(李仁老)의 시()임춘(林春)의 문()을 합평(合評)하여, 이인로(李仁老)는 단련에 능했으나 펴지 못했고 임춘(林春)은 진밀(縝密)에 능했으나 통하지 못했다.

李仁老能鍛鍊而不敷, 林春能縝密而不關.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임춘(林春)의 문장(文章)을 깎아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격(氣格)이 그렇게 높지 못하고 조어(造語)에 있어서도 공교하고 정치(精緻)하지 못하여 한 시대의 시인(詩人)에 지나지 않을 뿐, 멀리 전하여 그 이름을 오래남길 만한 자는 아니다.

氣格未甚軒高, 造語未甚工緻, 不過一世之韻士, 非傳遠不朽者也.

 

 

그러나 임춘(林春)의 장처(長處)는 시()보다는 문()에 있었던 것 같다. 포의(布衣)로서 일생(一生)을 끝낸 그답지 않게 동문선(東文選)과 같은 선발책자(選拔冊子)에 그만큼 많은 문장(文章)이 뽑힐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단 특기(特記)할 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는 문장(文章) 구법(句法)동파(東坡)와 핍진(逼近)하다고 하여 스스로 기뻐 하였거니와 진밀(縝密)한 그의 문장(文章)을 칭도한 후대인의 비평도 모두 산문(散文)과 유관(有關)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문집(文集)30()이 넘는 장편(長篇) 고시(古詩)를 남기고 있는 사실도 그의 산문취향(散文趣向)과 무관(無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시는 180여수(餘首)가 문집(文集)에 수록되고 있으며 시선집(詩選集)에 뽑힌 것은 20()에 이른다. 이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代表作)으로는, 차우인운(次友人韻)(七絶)을 비롯하여 여이미수회담지가(與李眉叟會湛之家(七律), 모춘문앵(暮春聞鶯)(七絶), 다점주수(茶店書睡)(七絶) 등이 여러 시선집(詩選集)에 뽑히어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시작(詩作)은 그의 시우(詩友) 이인로(李仁老)파한집(破閑集)권하(卷下) 17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가 재주는 있으나 쓰이지 못하여 하늘가에 유락하여 나그네 신세로 떠돌아다니던 모습이 똑똑히 다 몇 자 사이에 나타났으니 이른바 시()가 마음에서 발원한다는 것이 믿음직하다.

其有才不見用, 流落天涯羈遊旅泊之狀, 了了然皆見於數字間, 則所謂詩源乎心者信哉.

 

 

기세탄식(棄世歎息)하는 넋두리가 많아 그 품격비평(品格批評)에 있어서도 고한수담(枯寒瘦淡)한 것으로 정평(定評)되고 있다. 이는 시()도 사람을 닮아 그토록 궁한(窮寒)하다는 말과 통한다.

 

차우인운(次友人韻)은 다음과 같다.

 

十載崎嶇面撲埃 십년동안 기구한 신세 얼굴에 먼지 투성이
長遭造物小兒猜 오랫동안 조물주 녀석 나를 시기했다.
問津路遠槎難到 나루터도 길이 멀어 뱃길도 가기 어렵고
燒藥功遲鼎不開 선단(仙丹)을 다리는 일도 늦어 솥도 아직 안 열었네.
科第未消羅隱恨 과거(科擧)는 아직도 나은(羅隱)의 한 가시지 않고
離騷空寄屈平哀 이소(離騷)에 공연히 굴원(屈原)의 슬픔 부쳤네.
襄陽自是無知己 양양(襄陽) 맹호연(孟浩然)이 워낙 지기(知己)가 없은거지,
明主何曾棄不才 명황(明皇)이 어찌 일찌기 재주 없다 버렸던가?

 

이 작품은 당시 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성실(誠實)하게 시()를 익힌 임춘(林春) 자신의 해박(該博)을 과시한 득의작(得意作)이며 동파시(東坡詩)를 배우던 소단(騷壇)의 속상(俗尙)을 사실로써 보여 준 것이다. 이인로(李仁老)가 그의 파한집(破閑集)권하 7에서 임춘(林春)희증성주졸(戱贈星州倅)【『동문선(東文選)에는 제목이 희증밀주졸(戱贈密州倅)로 되어 있다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칭도했다.

 

 

고사(故事)를 사용한 솜씨가 더욱 정교(精巧)하여, 이야말로 고인(古人)금실로써 수를 놓았지만 흔적이 없다고 한 바로 그것이다.

其用事益精, 此古人所謂: “蹙金結繡 而無痕跡

 

 

이 작품의 경우에도 그대로 들어 맞는 말이다. 특히 미련(尾聯)양양자시무지기 명주하증기부재(襄陽自是無知己, 明主何曾棄不才)’는 유명한 맹호연(孟浩然)의 사실(史實)을 의모(擬模)하여 자신의 처지(處地)맹호연(孟浩然) 이상으로 돋보이게 한 곳이다. 맹호연(孟浩然)이 명황(明皇)에게 부재명주기 다병고인소(不才明主棄, 多病故人疏)’라 하였다가 도리어 경불구아 아기기경(卿不求我, 我豈棄卿)?’라고 핀잔을 받은 고사(故事)를 원용(授用)하여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맹호연(孟浩然)을 타매(唾罵)하고 있다. 맹호연(孟浩然)은 워낙 친구도 없었을 뿐 아니라 구사(求仕)도 해 보지 않고 버림받은 몸으로 자처(自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춘(林春) 자신은 재주도 있고 과거(科擧)에도 응()했지만 끝내 쓰임을 입지 못했다는 것이 이 작품(作品)에 함축(含蓄)되어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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