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버린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현대인에게는 눈물의 에티켓이 있다. 이토록 쿨한 세계에서는 아무 데서나 주책없이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 사방이 꽉 막힌 스크린 앞에서, 혹은 아무도 우는 내 모습을 보지 않는 텅 빈 방 안의 TV를 보면서. 화면 안에서는 저토록 넘쳐나는 눈물이 현실 속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의 화면을 핑계로, 구실로, 울고 웃고 떠드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현실을 가장 리얼하게 재현한다고 믿어왔던 ‘사진’을 보면서도 울 수 있을까.
사진에는 무엇보다 ‘소리’가 없다. 소리에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특유의 힘이 있다. 우리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비치는 화면을 보며 울지만 정작 거기서 ‘사운드’가 빠진다면 화면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포토저널리즘이 극대화된 현대의 사진문화 속에서 대부분 세련되게 다듬어진, ‘연출된 사진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는 사진이 막상 지나치게 리얼한(?) 이미지를 담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린다. 너무 끔찍하거나, 너무 ‘날 것’이거나, 그 고통이 내게 전염될까 봐, 혹은 사진으로 전시된 고통이 너무 생생해 구역질이 난다는 이유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유명한 평론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머나먼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구경거리로 만드는 각종 사진들, 그리고 그 사진들을 유통시키는 저널리즘을 비판했다. 수전 손택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매일 보는 재난 사진이야말로 현대인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매체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하게 전시하는 사진 이미지를 보며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함께 아파하기보다는 ‘전시된 고통’의 이미지에 마취되어,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끝내는 고통을 타자화시킨다는 것이다.
실제의 공포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를 쳐다볼 때에는 충격과 더불어 수치감이 존재한다. 아마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즉, 그런 사진이 촬영됐던 군사 병원의 외과 의사)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간에, 이런 섬뜩함은 우리를 구경꾼이나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사람들로.”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67~68쪽.
수전 손택이 비판한 것은 ‘사진’이라는 미디어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기 쉽게’ 편집하고 수정하여 ‘유통’시키는 현대인의 잔혹성이다. 그녀의 사진론은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진짜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 영화도 미디어일 뿐이다. 영화는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평생 동안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소중한 메시지의 통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굿 윌 헌팅』은 ‘천재 소년의 성장 스토리’라기보다 ‘타인의 고통에 눈뜨는 소년의 내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자기 고통에 골몰하느라 이 세상 그 누구의 고통에도 무관심하던 한 소년이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몇 번이나 입양되고 파양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양아버지의 매일 밤 계속되는 린치에 학대당하던 소년. 자신의 고통을 반복하여 곱씹으며 매일매일 영화처럼 ‘리와인드’하던 소년. 그 고통에 중독되어 한 번도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던 한 소년이,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이 ‘사진 속의 아련한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소년이, 진정한 소울메이트를 만나 ‘액자 속에 갇혀 있던 세상’을 비로소 날 것으로 만나는 이야기 말이다.
▲ 사진 - ‘어느 (공화파)병사의 죽음’(1936년, 스페인 코르도바) / 로버트 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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