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와 미르치아 엘리아데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1. ‘문턱’을 넘는 순간, 내 안의 신화는 시작된다
본성은 한정되어 있으나, 욕망에 있어서는 무한대를 달리는 인간은 천국을 기억하는 타락한 신이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프랑스의 시인)
만약 세계 한가운데서 살고자 한다면 세계를 창건해야만 한다. -엘리아데
다가오는 시험이 걱정스럽고, 줄어드는 통장 잔고가 걱정스럽고, 가족들의 잔병치레가 걱정스러운 이 ‘일상적 고통의 차원’을 뛰어넘는 고통이 있다. 이런 걱정들은 각각 시험이 끝나면 해결되고 월급이 입금되면 잊히며 건강이 회복되면 사라진다. 그저 열심히 살아서는 해결될 수 없는 고통, ‘나 하나’의 개인적 안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욕망.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세속적 일상을 질주하다가도 문득 ‘아, 이게 전부가 아닌데.’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저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이 똑같은 일상이 내 인생의 전부이면 어떡하지? 회사나 학교의 스케줄에 따라 복종하는 이 틀에 박힌 일상으로 내 인생이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이렇게 정신없이 살고 있는데 이 모든 난리법석에 아무런 ‘의미’가 없으면 어떡하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 삶이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을 때, 아무리 안간힘 써도 나의 운명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될 때. 우리는 이렇게 ‘위로받을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진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은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회사생활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해커’라는 ‘제2의 가면’을 쓰고 자기만의 또 다른 정체성을 찾아 헤맨다. 그는 낮에는 유능한 회사원으로, 밤에는 지하세계에서 유명한 ‘네오’라는 이름의 해커로 살아간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이 세속적 일상 너머에 어딘가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를 나만의 신화, 나만의 성스러운 삶의 목표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컴퓨터 해킹을 하며 자신의 마음속에 떠도는 정체불명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인 컴퓨터가, 그에게 정말 ‘말’을 걸어온다. 그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컴퓨터: 일어나, 네오……
토마스: 뭐야?
컴퓨터: 넌 매트릭스에게 사로잡혔다.
토마스: 그게 무슨 소리지?
컴퓨터: 흰 토끼를 쫓아라!
토마스: 흰 토끼를 쫓으라고? (갑자기 토마스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토마스는 자신이 해킹한 프로그램을 왈패들에게 넘겨주다가 문득 그들 중 한 명의 몸에 하얀 토끼 문신이 그려져 있음을 발견한다. 마치 신성한 계시를 따라가듯, 신비로운 주문에 홀린 듯 자신도 모르게 하얀 토끼가 그려진 여인을 따라가는 토마스. 그는 왈패들을 따라 간 술집에서 매혹적인 여인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를 만난다. 트리니티는 마치 오래전부터 그를 너무도 잘 알아왔다는 듯한 친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트리니티를 만나는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토마스’가 아니라 ‘네오’가 된다. 트리니티가 찾는 것도 토마스가 아니라 네오였기 때문이다. 아마 신화학자 엘리아데가 이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네오는 지금 ‘성(聖)’과 ‘속(俗)’ 사이에 놓인 ‘문지방’을 넘어가고 있는 거라고. 엘리아데는 세속에서 신성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특성을 교회의 내부로 열려 있는 ‘문지방’의 공간적 은유를 통해 설명한다.
두 개의 공간을 갈라놓는 문지방은 (……) 세속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사이의 거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 문지방은 한계점이요 경계선이며, 두 개의 세계를 갈라놓고 대립시키는 구분선이다. 동시에 그것은 이들 세계가 교섭을 갖고, 세속적인 것에서 거룩한 것에로의 전이 가능성을 얻게 되는 역설적인 장소이기도 한다. (……) 몇몇 고대 문명(바빌론, 이집트, 이스라엘)에서는 판결의 장소를 문지방 위에 위치시켰다. 문지방, 문은 공간에 있어서의 연속성의 단절을 직접적으로 또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여기서 그것이 갖는 커다란 종교적 중요성이 유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이행의 상징이자 동시에 매개자가 되기 때문이다.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6, 23쪽.
트리니티: 안녕, 네오!
네오: 날 어떻게 알지?
트리니티: 난 널 잘 알아. 난 트리니티야.
네오: 그 트리니티? 국세청을 해킹했던?
트리니티: 오래 전 얘기지.
네오: 맙소사.
트리니티: 왜?
네오: 남자인 줄 알았거든.
트리니티: 다들 그래.
네오: 나한테 메시지를 보냈지? 어떻게 한 거야?
트리니티: 중요한 건, 넌 지금 위험하다는 거야. 경고하려고 불렀어.
네오: 무슨 경고?
트리니티: 그들이 널 보고 있어.
네오: 누가?
트리니티: (네오의 귀 가까이로 바싹 다가오며 속삭인다.) 그냥 듣기만 해. 네가 왜 여기 왔는지 알아. 네가 뭘 했으며 왜 잠을 못 자고 왜 혼자 살며 밤이면 밤마다 왜 컴퓨터 앞에 앉는지도. 넌 그를 찾고 있어. 난 알아, 나도 한때 그랬으니까. 그가 날 찾았을 때 그는 내가 찾아낸 건 자기가 아니라 해답이랬어. 우릴 움직이는 건 질문이지. 그게 널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야. 넌 그 질문이 뭔지 알아.
네오: 매트릭스란 뭐지?
트리니티: 정답은 어딘가에 있어. 그것은 널 찾고 있고 곧 찾을 거야. 네가 정말 원한다면.
네오는 ‘하얀 토끼’를 따라감으로써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뀔 것임을 예감한다. 그러나 아직 네오는 혼란스럽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자신이 어쩌면 ‘성스러운 세계’의 일원일지도 모른다는, 이 믿음은 아직 너무 많은 의혹들에 흽싸여 있기 때문이다. 네오는 지금 믿음이라기보다는 ‘유혹’이나 ‘의혹’에 가까운 감정으로 트리니티를 바라보다. 엘리아데를 비롯한 수많은 신화학자들이 말하는 신성은 객관적인 세계 바깥에서 외따로 고립되어 있는 신비가 아니다. 신성은 객관적 현실을 넘어선 어떤 것이 객관적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토마스 앤더슨이 ‘네오’가 되는 것은 단지 ‘세상 바깥’의 이질적인 세계가 출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쭉 찾아왔던 것, 그의 일상 속에서 늘 함께 하고 있었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이제야 비로소 ‘계시(revelation)’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그 모든 알 수 없는 신비와 공포와 경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생은 의미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뜻하는 말일 뿐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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