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직업은 무엇입니까?
범죄는 재판에 대한 감옥의 복수이다. 재판관을 어안이 벙벙하게 할 정도로 대단히 무시무시한 복수이다. 그때 범죄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390쪽
여동생의 애인을 처음 봤을 때 오빠나 아버지가 하고 싶은 질문 1위는 무엇일까. 애인이 무척 어리다면 ‘아버지는 뭐하시나?’일 것이고 애인이 충분히 성숙하다면 ‘자네 직업은 뭔가?’정도가 아닐까. 이 기준에 따르면 마리 크루츠가 사랑에 빠진 이 남자 제이슨 본은 결코 ‘바람직한’ 신랑감이 아니다. 직업이나 부모님의 자산 정도는 물론 가족이나 주소나 국적조차 확실하지 않은 이 남자. 결국 우리는 ‘본’ 시리즈 1편에서 주인공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고 영화관을 나오게 될 정도니 말이다.
마리의 오빠 에몬은 어김없이 마리에게 질문한다. “저 사람 직업이 뭐야?” 직업도 확실하지 않고 이름과 국적조차 확실하지 않은 제이슨 본의 인적사항에 대해 마리는 대충 둘러댄다. “선박 회사 다녔었어.” 아마도 그것조차 ‘만들어진 정체성’임에 분명한, 제이슨 손이 파리에 있었을 때의 가짜 직장은 선박 회사였던 것이다. 검열의 장치는 감옥이나 CIA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알아가는 방식’, 타인에 대한 인식 방법 자체에 끈덕진 검열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베아스’라는 어느 부랑자의 1840년 재판 기록을 들추어낸다. 재판장은 집요하게 당신의 집은 어디이냐, 당신은 직업은 무엇이냐, 당신의 가족은 누구이냐 등등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외부적 조건을 묻는다. 그런데 이 부랑자 베아스는 재판장의 각종 질문 공세에 절대 쫄지 않는다. 유유자적하고 여유만만하게, 마치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귀찮다는 듯이, 재판장의 질문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다.
재판장: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잠을 자야 합니다.
베아스: 내가 집이 있겠습니까?
재판장: 피고는 언제까지나 떠돌이로 지낸다는 거군요.
베아스: 나는 일해서 먹고 삽니다.
재판장: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베아스: 내 직업이라 (……) 우선 적어도 36개 정도가 되지요. 게다가 어느 일정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 나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합니다. 예컨대 낮에는 모든 통행인들에게 자그마한 무료 인쇄물을 나눠 주기도 하고, 승합 마차가 도착하면 좇아가서 승객의 짐을 나르고, 뇌이이 거리에서 팔다리를 번갈아 짚어 가는 재주넘기를 하고, 밤에는 극장을 기웃거리고, 무대의 휘장을 열어주고, 극장의 외출권을 팔기도 합니다. 나는 무척 바쁜 사람입니다.
재판장: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배우는 것이 피고에게는 더 나을 텐데요.
베아스: 천만에요. 좋은 직장, 견습, 그런 것은 지겨울 뿐이요. 그리고 부르주아가 되어도 늘 불평거리가 많고 또 자유도 없지 않습니까.
재판장: 피고의 아버지는 피고를 야단치지 않습니까?
베아스: 아버지가 없습니다.
재판장: 그렇다면 피고의 어머니는?
베아스: 없습니다. 친척도 친구도 없습니다. 나는 남의 속박을 싫어하는 자유인입니다. 2년 징역 선고를 듣자, 베아스는 매우 험악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으나 곧 유쾌한 기분을 되찾고는 이렇게 말했다. “2년이라면 기껏해야 24개월밖에 안 되겠군요. 자, 일어서지요.”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441~442쪽.
베아스는 무려 36개의 직업을 가진, 말하자면 ‘홍반장’ 같은 사람이었나 보다. 이토록 바쁜 그를 재판장은 단지 주소가 없다는 이유로,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위험한 인물’로 처리한다. 푸코의 말처럼 재판장은 자신이 주거를 공급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모든 사람에게 안정된 주거와 가정생활을 강요하고 있다.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피고뿐 아니라 우리가 ‘한 사람’을 인식할 때 필수적으로 입력하는 기본 데이터다. 이 질문 하나에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검열의 그물이 친친 감겨 있었던 셈이다. 이런 ‘근대적 직업관’에 따르면 베아스처럼 수십 개의 일용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은 통계적으로 무직자, 부랑자, 홈리스, 그러므로 ‘위험인물’로 낙인찍힌다. 사범기관을 비롯한 각종 국가장치가 보호하려는 것은 ‘안정된 사회의 기득권’이며 저 ‘하찮은’ 부랑자의 안위가 아니니까. 그는 주소와 직업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문명’을 거부한 ‘야만인’으로 선고받았다.
어젯밤 뉴스에서 ‘10대 청소년 가출, 한 해 10만 명으로 급증’이라는 뉴스 헤드라인을 봤다. 뉴스를 가만히 들어보니 ‘집계되는’ 가출 요인으로서 가장 많은 것은 ‘가정 폭력’이라고 한다.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매일 잔혹한 가정 폭력을 지켜보거나 당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집에서 버티는 것이 나을까, 적어도 내 가족에게 구타당하거나 내 가족이 구타당하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도망치는 것이 나을까.
그런데 그 뉴스의 결론이 압권이었다. “가출한 청소년들은 수입이 많은 범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가출 청소년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데이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기사는 막연히 ‘가출 청소년 = 통제되지 않은 인구 = 위험인물군 = 미래의 범죄인’이라는 식의 도식을 전제하고 있었다. 단지 집을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들은 ‘잠재적 위험인물군’으로 처리된다.
주소와 직업과 연락처…….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인적사항은 우리를 가장 뿌리 깊게 통제하고 있는 검열의 코드인 셈이다. 우리가 연락처와 주소, 직업과 가족 관계를 밝히는 것을 거부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라도 손쉽게 ‘위험인물군’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이해될 수 있는 인물’의 행동 패턴을 그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문명사회의 이방인이 되어버린다. 사상 최대의 위험인물, 우리의 제이슨 본은 자신 앞에 놓인 이 ‘정체성의 원형감옥’을 어떻게 탈주할 것인가.
“피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사회에서 확립되는 질서의 가장 단순한 표현이다. 방랑생활은 질서에 어긋나고 사회를 교란시킨다. 따라서 모든 공격에 대항하여 사회를 튼튼하게 방위하기 위해서는, 중단되지 않는 장기간의 안정된 작업, 장래의 계획과 미래에 대한 설계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인이 있어야 하며 위계질서 속에 포함되어 제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사람은 일정한 지배관계 안에 고정된 상태로만 존재한다. “피고는 누구의 집에서 일합니까?”라는 물음은 다시 말하자면, 당신은 주인이 아니므로, 어떤 조건에서든 하인이 아니면 안 되며, 당신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질서의 유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4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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