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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네필 다이어리,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 5.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본문

책/철학(哲學)

시네필 다이어리, 본 아이덴티티와 미셸 푸코[‘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의심하라] - 5. ‘기억할 수 없는 나’가 ‘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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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억할 수 없는 나기억을 찾는 나를 추격하다

 

 

과거의 나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새로운 나이다. (……) 자기 명시는 동시에 자기 파괴이다.

-미셸 푸코, 이희원 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77

 

 

제이슨 본은 낯선 여자의 차를 힘겹게 얻어 타고 파리로 가면서 생각했을 것이다.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잃어버린 나를 찾기만 하면,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고. 그러나 과거 그가 거주했던 파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커져가는 두려움도 숨길 수 없다. 나를 찾기만 하면, 정말 이 모든 공포와 불안이 해소될 수 있을까. 나를 찾아내는 것이 꼭 좋은 일일까. 파리에 간다고 해도, 나를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파리에 가면 나를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기는 한 걸까.

 

온갖 생각의 실타래로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제이슨의 머릿속. 지금 그에게 유일한 지인(知人)은 오직 1만 달러를 받고 취리히에서 파리까지 운전을 해주기로 한,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낯선 여성, 마리 크루츠뿐이다. 막상 파리로 도착하자 둘은 그냥 헤어지기에는 왠지 아쉬운, 서로의 감정을 동시에 알아차린다. 제이슨은 내가 누구인지를 혼자 알아내고 확인하기가 문득 두려워지고, 마리는 파리행 차비로 2만 달러를 아낌없이 내버리는 이 남자, 기억상실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이 남자의 아이덴티티가 못 견디게 궁금해진다. 물론 두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 ‘네가 누구인지모르는 낯선 남녀일 뿐이지만, 두 사람은 그 모든 외적 상황과 전혀 관계없이 매혹적으로 빛나는 서로의 싱그러운 육체를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린다.

 

 

제이슨: 태워줘서 고마워요.

마리: 천만예요.

제이슨: , 올라와도 돼요. 여기서 기다리든지요. 확인하고 올게요, 기다려요.

마리: 같이 가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당신은 아마 날 잊어버릴 거예요.

제이슨: 잊을 리가 있겠어요?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 걸요.

 

 

제이슨의 집 주인은 본 선생을 알아보고 엄청나게 반가워하지만, 제이슨은 정작 집주인 아주머니를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호화로운 인테리어로 가득한 제이슨 본의 집안에서 저마다 나의 흔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물건들을 하나도 알아 볼 수가 없다. “세상에, 하나도 못 알아보겠군요.” 자신이 살았다고 추정되는 곳에 와서도 기억을 떠올릴 수가 없자 제이슨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자신이 묵었다고 추정되는 호텔의 주소를 찾아 전화를 건다. 제이슨 본의 이름으로 투숙자를 찾아보니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여권의 이름 마이클 케인으로 찾아보니 드디어 자신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알게 된 소식은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호텔 프론트의 전화 너머로 들리는 직원의 메시지에 제이슨, 아니 아직 여전히 그저 제이슨으로 추정될 뿐인 정체불명의 이 남자는 절망한다. “안타깝게도, 마이클 케인 씨는 2주 전에 사망하셨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였습니다. 현장에서 즉사하셨습니다. 손님께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진심으로, 대단히 유감입니다.”

 

그토록 찾았던 인데, 내 목숨을 걸고, 원치 않는 살인까지 해가며 죽을 힘을 다해 나를 찾았는데, 나를 찾는 순간 내가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는 여기 살아있는데 내가 찾는 나는 죽어버렸다. 도대체 죽어버린 나와 살아 있는 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모든 기억을 다 상실해버렸는데도 왜 나는 살인 기술만은 잊지 않고 있는 것일까. 정말 죽어버린 나를 되찾아도 되는 것일까.

 

급기야 안전한 줄만 알았던 이 파리의 아파트에까지 괴한이 침입해 들어오고, 겁에 질린 마리 앞에서 그는 자신과 마리를 동시에 죽이려는 그 괴한을 쓰러뜨리고 만다. 마리는 물론 제이슨 그 자신도 자신이 보유한 엄청난 살인 능력에 기가 질려버린다. 그는 점점 자기가 찾고 있는 자신이 무서워진다. 내가 누구기에 나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이 상황에서도 이토록 엄청난 살인의 기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일까.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도대체 어떤 무서운 훈련 과정을 거쳐야 온몸이 살인 무기인 나 같은 존재를 제조해낼 수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너무 두려워진 제이슨은 마리에게 이 모든 두려움을 고백한다. 그가 알고 있는 이 세상 유일한 사람은 마리 한 사람뿐이니까.

 

 

제이슨: 대체 어떤 사람이 돈과 여섯 개의 여권, 그리고 총으로 채워진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죠? 누가 엉덩이에 은행 계좌번호를 박고 다니죠? 내가 여기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 일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와 비상구를 찾는 것이었죠. 밖에 주차된 자동차 여섯 대의 번호판을 외웠고, 웨이트리스가 왼손잡이라는 것도, 카운터에 앉아 있는 사내의 몸무게가 97.5kg이라는 것도 말할 수 있죠. 저기 회색 트럭 안에 총이 들어있다는 것도 알아요. 또 이런 고도에선 난 800미터 정도는 끄떡없이 달릴 수 있다는 것도 알아요. 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걸 아는 거죠? 난 내 자신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죠?

 

 

개인별로 특징화하면서도 집단적으로 유용한 능력을 양성하기 위한 방법의 최초 핵심이 되었던 것은 아마도 교단적인 생활 방식과 구도 과정이었을 것이다. 신비주의적이거나 혹은 금욕적인 형식을 통하여, 수련은 구원을 얻기 위해 이 세상의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수련은 (……) 그 의미를 점차적으로 전도시키게 된다. , 인생의 시간을 관리하고, 그것을 유용한 형태로 축적하며, 이렇게 조정된 시간은 인간에 대한 권력의 행사에 이바지한다. 신체와 시간에 관한 정치적 기술의 한 요소로 편입된 훈련은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완성되는 복종을 지향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오생근 역, 감시와 처벌, 나남출판, 2004,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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