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타인의 내면을 파괴하는 기술
알버트: (드라이든의 생일 파티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이 사람들은 이제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군.
드라이든: (체념한 표정으로)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하겠어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익숙해져요.
알버트: 그래, 예전엔 참지 못하던 것도 결국 다 받아들이지. 이젠 아무도 변화를 기대하지 않아…….
흔히 예술가의 영감은 저마다의 권태와 절망의 ‘바닥’을 치고 나서 폭발하곤 한다. 루쉰이 오랫동안 절필한 끝에 써낸 걸작 『광인일기』를 쓰기 전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는 오랜 칩거 생활에 익숙해졌고,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써도 아무런 메아리도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 절망했으며, 절망 자체에 익숙해져버려 그 어떤 사회적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루쉰에게 친구가 찾아와 중국의 청년들을 일깨우기 위한 잡지 『신청년』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친구가 루쉰의 글이 필요하다며 간곡히 그를 설득하자, 더 이상 어떤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던 루쉰은 단칼에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고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
“가령 말이야, 쇠로 만든 방이 있다 치자고.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는 조금도 느끼지 않지.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있는 사람 몇 명을 깨운다면 말이야. 그 불행한 소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게 될 텐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어?”
하지만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그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루쉰, 유세종/전형준 편역, 『투창과 비수』, 솔, 1997, 89~90쪽.
친구의 반박을 듣는 그 순간, 루쉰의 마음속에서는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희망의 거처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라는 것을. 그는 ‘희망이 있을 수도 있다’고 믿는 타인의 가녀린 희망까지 빼앗을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절망을 미래의 세대까지 전염시킬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실로 오랜만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절망조차 손쉽게 말살할 수 없는 희망의 존재 이유를 깨달은 직후 루쉰이 쓴 작품이 바로 『광인일기』다. 절망의 심연에서 비로소 움트는 냉정한 희망의 목소리가 거기 담겨 있다.
루쉰이 말한 ‘쇠로 만든 방’은 그가 생각하는 ‘출구 없는 중국’이었고, 당시 그 암울한 중국의 상황은 『타인의 삶』이 묘사하는 동독의 상황과도 닮았다. 아무런 출구도 희망도 없는, 그리하여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고문이었던. 『타인의 삶』의 주인공 드라이든에게도 이렇게 절망의 맨얼굴을 대면하는 일이 일어난다. 당국의 감시와 검열이 격화되자 드라이든은 점점 지쳐가고, 창작에 대한 정열도 점차 잦아든다. 그러던 어느 날, 존경하는 선배 작가 알버트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사실 드라이든은 볼 때마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는 듯한 알버트를 만나는 것이 편치 않았다. 드라이든은 아직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것을 모를 뿐 아니라 명실공히 성공한 작가였고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살고 있었다. 예술가에게 ‘산소’만큼이나 중요한 ‘창작의 자유’가 없다는 것, 그로인해 알버트가 그토록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을 드라이든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드라이든은 알버트의 쓸쓸한 장례식에서 비로소 지금까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유가 없다는 것은 ‘진짜 공기’가 아닌 인공호흡장치로 수동적인 호흡을 하며 살아남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홀로 안고 죽어간 알버트의 처절한 고독을 비로소 이해한다. 그는 잃어버린 자유라는 무형의 산소를 되찾는 싸움을, 그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관객은 드라이든과 함께 깨닫는다. 어떤 경우에는, 자유를 찾기 위한 싸움 자체가 더없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일 수 있음을.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 물론, 나는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믿어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그만이다.)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는가.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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