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이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웅장(雄壯)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은 세론(世論)이 공통적으로 일컬어 온 일이거니와, 「답전리지눈문서(答全履之論文書)」는 특히 그러한 증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충분하고 남는다. 일필(一筆)에 삼백운(三百韻)을 뽑아내는 장편(長篇)의 구사력(驅使力)이 이 글에서도 그대로 발휘되고 있다. 편지 한 편에 일천수백언(一千數百言)을 거침없이 쏟아 내는 힘과 기상(氣象)은 그의 권능(權能)임에 틀림없다.
『문선(文選)』 문(文)이 모범 문장(文章)으로 통행하고 있던 당시의 속상(俗尙)에서 빠져나와 당송(唐宋) 고문(古文)의 간결한 매력에 미련을 갖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명쾌(明快)를 특징으로 하는 고문(古文)의 구속은 본질적으로 감내(勘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로잡힘이 없이 자유롭게 붓가는 대로 내리갈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에게 굴레란 처음부터 가당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육경(六經)ㆍ자사(子史)를 읽었으되 섭렵만 하였을 뿐 그 궁원(窮源)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했다. 동파(東坡)를 근세의 제일대가(第一大家)로 추켜 올리면서도 끝내 그는 동파(東坡)를 본받았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설사 동파(東坡)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천성(天性)으로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정도다.
죽어도 남의 글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신어(新語)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남의 글을 훔쳐서 쓰려고 해도 원래 읽은 글이 없으므로 훔치려고 해도 훔칠 수가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다. 더욱이 그는, 옛 사람은 조의(造意)만 하고 조어(造語)는 하지 않았는데 자신은 뜻과 말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세상의 빈축을 받았다고 자만하고 있다. 그러나 어(語)와 의(意)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언어학의 상식에 걸려 그는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신경(新警)과 기발(奇拔)을 좋아하여 신어(新語)ㆍ신의(新意)를 창출한 것은 이규보(李奎報) 문장(文章)의 장처(長處)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발(奇拔)과 기괴(奇怪)가 같은 속성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그의 글 도처에서 창출한 신조어(新造語)들이 이러한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그의 다른 글 「논시중미지약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도 의기론(意氣論)을 개진하고 시의 함축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시는 대체로 ‘약(略)’보다는 ‘상(詳)’에 가깝다. 말의 뜻은 깊지만 시의 뜻은 깊지 못하다는 것이 적평(的評)이 될 것이다.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기승(氣勝)한 시인에게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도 모른다.
그는 외로운 시인(詩人)이요 문장가(文章家)였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백락천(白樂天)을 경모(敬慕)하였지만 이때는 이미 그의 모든 것이 지쳐 있었던 것 같다. 색마(色魔)ㆍ주마(酒魔)ㆍ시마(詩魔)가 그를 괴롭힌 친구요, 이 중에서도 시마(詩魔)는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은 마귀였다고 자술(自述)하고 있지만 이때는 시도 이미 기력을 상실한 듯이 보인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