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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36장 - 미명(微明)의 관계로 보는 지혜로움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36장 - 미명(微明)의 관계로 보는 지혜로움

건방진방랑자 2021. 5. 1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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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將欲歙之,
장욕흡지,
장차 접으려 하면
必固張之;
필고장지;
반드시 먼저 펴주어라.
將欲弱之,
장욕약지,
장차 약하게 하려 하면
必固强之;
필고강지;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
將欲廢之,
장욕폐지,
장차 폐하려 하면
必固興之;
필고흥지;
반드시 먼저 흥하게 해주어라.
將欲奪之,
장욕탈지,
장차 뺏으려 하면
必固與之.
필고여지.
반드시 먼저 주어라.
是謂微明.
시위미명.
이것을 일컬어 어둠과 밝음의 이치라 하는 것이다.
柔弱勝剛强.
유약승강강.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이다.
魚不可脫於淵,
어불가탈어연,
물에 사는 고기는 연못을 튀쳐 나와서는 아니 되나니
國之利器不可以示人.
국지리기불가이시인.
나라의 이로운 기물은 사람에게 보여서는 아니되리.

 

 

1. 접으려면 반드시 펴주어야 한다(將欲歙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이 장은 노자전 장을 통하여 많이 인용되는 유명한 장의 하나로 꼽힌다. 대개 병가(兵家)와의 관련을 말할 때, 주로 전술 전략적 측면의 많은 이야기들이 이 장에서 연역되어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병가적(兵家的) 지혜와 노자(老子)의 지혜의 선후(先後)를 가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미명(微明)’이라는 노자의 사상에서 우리는 노자철학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깊게 통찰하여야 할 것이다. 즉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자연의 대칭성(Symmetry)에 관한 어떤 원초적 통찰의 한 예를 발견하는 것이다. 대칭도 물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건들 사이에서 존속하는 동적인 우리 마음의 개념들일 것이다.

 

이 장은 간본(簡本)에는 없다. 백본(帛本)에 보존되어 있으나 왕본(王本)과 대차가 없다.

 

우선 최초의 문장을 샘플로 분석해보자. ()이란 사물의 수축상태를 말한다. ()이란 사물의 팽창상태다. 물론 우리의 이해를 쉽게하기 위하여 우산 같은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우산을 접으려 하면 먼저 펴주어라! 이때 일단 목적은 접는다고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접으려고 해서 다짜고짜 접으려고만 강압을 행하면 안 접힌다는 것이다. 오히려 펴주라는 것이다. 다음 것도 마찬가지 구조로 되어있다. 어떤 한 사물을 약()하게 만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라고 노자는 충고한다. 자아! 이 말은 무엇인가?

 

여기 ()’라는 부사적 용법의 이해가 중요하다. ‘()’를 문맥의 흐름을 따라 나는 먼저라고 번역했지만, ()는 일반적으로 고유하다.’ ‘원래의등의 뜻으로 쓰인다. 즉 약화를 목표로 한다면 강화를 선행시켜야 한다는 것은 원래, 고유한 사물의 성질 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즉 수축과 팽창, 약화와 강화, 폐지와 흥기, 탈취와 수여, 이 양면의 사태는 분리된 실체적 사태가 아니라 알고 보면, 그것은 하나의 도()의 대칭적 양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는 것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Returning is the movement of Tao)’의 세계관이다.

 

4개의 쌍이 왕본(王本)백본(帛本)에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의미상의 중요한 변화는 없다. 왕본(王本)백본(帛本)의 애매함을 개선시켰다.

 

 

王本 帛本

 

 

 

2. 미명의 관계로 보는 지혜로움

 

미명(微明)’이란 무엇인가? 많은 주석가들이 이것을 미묘한 밝음(Subtle Light, Subtle Discernment)이라 하여 애매하게 번역했는데 이것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두 개의 개념의 조합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즉 미()미묘하다는 형용사가 아니라, 그것 자체로 독립적인 명사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는 명()과 대립적으로 즉 대대적(對待的)으로 쓰인 개념이다. 여기서 아는 미묘하다는 뜻에서 어둡다는 뜻이 파생된다. ‘()’는 곧 ()’. 미명(微明)은 곧 유명(幽明)의 다른 이름이다. 즉 밝음과 어둠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고리의 대칭적 측면인 것이다. 다음의 그림을 보라

 

끊임없이 굴러가는 바퀴를 한 방향에서 보면 우리는 항상 그 반쪽만 보게 될 것이지만, 그 반쪽은 기실 반쪽이 아니요, 그 전체를 우리는 항상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명()의 반쪽이요, 그 명()의 반쪽은 항상 미()의 반쪽을 대칭적으로 수반하고 있다. 결국 먕()은 미()로 가고, ()는 명()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명()만을 항상 바라본다. 그러나 그 명()은 미묘한 미(, )의 반면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일컬어 미명(微明)이라 하는 것이다. ()은 명()이지만 그것은 미()를 배면(背面)으로 갖는 명()이라는 것이다. 여기 이 말은 선행한 구문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흡()과 장(), ()과 강()의 관계가 미()와 명()의 관계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미명의 관계에서 보면 흡()하려면 먼저 장()해주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약하게 하려면 먼저 강하게 해주고, 폐하려면 먼저 흥하게 해주고, 뺏으려면 먼저 주어야 한다. 그것은 어김없는 미명(微明)의 사물의 이치인 것이다.

 

 

3. 노자와 예수의 메시지 차이

 

예수님의 말씀에 어려서부터 내 귀에 익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7:7

 

 

여기서는 구하고 찾음의 해결이 밖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사실이 모든 것이 알고 보면 미명(微明)의 순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하고 찾기 전에 내가 주고 내가 보일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 남의 집 문을 두드리기 전에 내 문을 활짝 열어 줄 생각부터 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멧세지와 노자의 멧세지의 차이인 것이다.

 

이러한 미명(徵明)의 굴레에서 보면 유약(柔弱)은 결코 유약이 아니다. 그것은 강강(剛强)을 이기는 것이다. 왕주를 한번 보자!

 

 

장차 억지스러움을 제거하고 폭력을 제거하려 한다면 당연히 노자가 말한 이 네 항목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요, 폭력이 스스로 자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형벌을 크게 믿고 사물을 다스리려 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명이라 말한 것이다.

將欲除强梁, 去暴亂, 當以此四者. 因物之性, 令其自戮, 不假刑爲大, 以除將物也, 故曰微明也.

 

이미 충분히 펴졌는데 더 펴지기만을 구하면 사물은 모두 옴츠리려 할 뿐이다. 덜 펴졌다고 더 펼려고만 하다가는 오히려 나만 위태롭게 될 뿐이다. (왕필주의 문장이 착간이나 탈자가 있어 명료하지 않다.)

足其張, 令之足, 而又求其張, 則衆所歙也. 與其張之不足, 而改其求張者, 愈益而己反危.

 

 

 

4. 나라를 다스리는 사회질서를 가시화하여선 안 된다(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이 구절을 이해키 위하여 왕주를 먼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로운 기물은 나라를 이롭게 하는 기물이다. 사물을 다스리는 것은 단지 사물의 본성에 의거할 뿐이다. 형벌에 의지하여 사물을 다스려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利器, 利國之器也. 唯因物之性, 不假刑以理物.

 

이로운 기물이란 눈에 보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물이 스스로 각기 제자리를 얻게 될 때 비로소 나라의 이로운 기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器不可覩, 而物各得其所, 則國之利器也.

 

사람에게 보인다는 것은 곧 형벌에 맡긴다는 뜻이다. 형벌로써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실책일 뿐이다.

示人者, 任刑也. 刑以利國, 則失矣.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면 곧 죽는다. 즉 실책임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나라를 이롭게 하는 기물이라고 하면서 형벌을 세워 백성에게 그 기물을 보인다는 것은 명백히 실책일 뿐이다.

魚脫於淵, 則必見失矣. 利國[]器而立刑以示人, 亦必失也.

 

 

유약함으로 강강(剛强)함을 이긴다는 것은 미명(微明)의 이치다. 그렇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강강함의 형벌로 다스려서는 아니되고 유약함의 도의 질서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나라의 ‘이기(利器)라 하는 것은 보이는 총ㆍ칼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회의 질서를 스스로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러한 힘은 마구 국민에게 가시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약 형벌과 같은 것으로 가시화시킨다면 그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을 튀쳐 나오는 것과도 같은 우매한 소치일 뿐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36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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